‘2026 국제 청년 안중근 평화 포럼-제1회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에 참여한 청년들이 10일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서 안 의사 유묵에 찍힌 손바닥 도장을 상징하는 왼손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꿈꿨던 ‘동양평화’는 116년이 지난 지금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탈했던 시대는 지났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고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청년 안중근이 남긴 평화의 질문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다.
그 질문을 안고 한국 청년 35명이 중국으로 향했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이은형 신부)는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10월 8~11일 중국 여순·대련·하얼빈에서 ‘2026 국제 청년 안중근 평화 포럼-제1회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를 개최했다. ‘의(義)를 품고 평화를 향해’를 주제로 열린 이번 순례에는 신자와 비신자 청년들이 함께했다. 연구소 위원 변진흥(야고보)·백장현(대건 안드레아)·박문수(프란치스코) 박사는 각 조를 맡아 역사 탐방과 토론을 도왔다.
참가자들은 순국 현장과 의거 장소,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을 차례로 찾아가며 안 의사가 남긴 미완의 평화를 마주했다.신앙인 안중근, 결단의 무게를 마주하다
청년들은 첫날 여순감옥과 일본관동법원을 방문했다. 일본관동법원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읊으며 저격의 정당성을 역설했던 장소다. 그러나 재판관 전원이 일본인인 불공평한 재판이었다. 6차례 공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은 안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완성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예비 신자 심현서씨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방법과 장소를 계획해야 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특히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그 결단의 무게가 남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누군가를 죽일 결심을 하게 만든 그 시대가 참혹하게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안 의사의 삶에서 신앙과 독립운동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연구소 소장 이은형 신부는 안 의사가 무장투쟁 중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준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행동에 담긴 생명 존중의 정신을 짚었다. 동시에 가톨릭 신자로서 살인을 금하는 가르침과 무력 저항의 현실 사이에서 겪었을 고뇌에도 주목했다.
청년들은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아 1909년 10월 26일 의거가 벌어진 현장을 확인했다.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위치를 표시한 1번 플랫폼 바닥 표식 앞에서 청년들은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마주했다.
마지막 날 찾은 김성백 집터에서는 의거를 가능하게 했던 동지들과 현지 한인들의 협력도 되새겼다. 안중근의 결단 뒤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헌신도 있었다.
대련만철구지진열관(옛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본사 건물) 앞에 전시된 철도와 열차.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1906~1945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존재했던 일본의 국책 회사다.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에 참여한 청년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1번 플랫폼 앞에 전시된 안 의사 유묵 사본을 바라보고 있다.
제국주의의 철길에서 분단의 현실을 보다
청년들은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주장했던 시대적 배경도 살피고 현장을 찾았다. 여순의 203고지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격전지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대련만철구지진열관은 옛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본사 건물이다. 일본은 철도를 군사력과 물자 이동, 자원 수탈의 기반으로 활용하며 만주 지배를 확대했다. 이곳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철도는 단순한 근대화의 상징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의 통로였다.
전체 일정을 인도한 임재근 박사는 철도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지닌 역설에 주목했다. 철도는 오늘날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됐지만, 당시에는 침략의 주요 수단이었다. 청년들은 대련에서 북쪽으로 약 1000㎞ 떨어진 하얼빈까지 고속열차로 이동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수단이었던 철도가 오늘날 편리함으로 변모한 역설의 현장을 관통했다.
하얼빈 731부대 유적에서는 전쟁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확인했다. 일본 관동군 소속 731부대는 세균전 연구를 명목으로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안 의사 순국 이후에도 이어진 일제의 침략과 전쟁 범죄는 평화가 무너졌을 때 인간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보여줬다.
백승민(로사)씨는 “100여 년 전의 역사가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한반도 역시 갈등의 위험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나 통일에 관심을 보이면 곧장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되는 우리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청년들이 진영 논리를 넘어 역사를 공부하고 스스로 평화의 의미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정(아기 예수의 데레사)씨는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청년들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현실도 짚었다. 그러면서 “과거의 역사를 교훈 삼아 오늘날 한반도에도 현명한 외교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역사에서 일상으로, 평화를 이어갈 방법
나흘간의 순례는 청년들에게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경민(로사리아)씨는 “안 의사가 고민했던 동양평화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오늘날의 갈등을 풀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각국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청년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예랑씨가 참여한 조에서는 한·중·일 청년들이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방안이 논의됐다. 김씨는 “3국이 서로 소통하고 대화할수록 이해하게 되는 게 있다”며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평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의정부교구 중부지구 봉사자 최안재(라헬)씨는 “교구대회 주제 중 하나가 ‘평화’인데 너무 무지하고 회피했다”며 “이번 여정은 참가 청년들이 평화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지막 날 하얼빈 조린공원에서도 안 의사가 남긴 마지막 당부를 되새겼다. 조린공원은 안 의사가 순국을 앞두고 자신의 유해를 임시로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옛 하얼빈 공원이다. 안 의사는 조국이 독립하면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 달라고 당부했지만, 일제는 그의 시신을 여순감옥 인근에 매장했다. 순국 1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한 매장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 순국 116주년 ‘21세기 동양평화론 청년 에세이 공모대회’에서 수상한 조이빈씨는 실제 현장을 찾은 뒤 또 다른 울림을 느꼈다고 했다. 조씨가 속한 조는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 지금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조사하고 후속 포럼에서 다룰 계획이다.
순례 마지막 날 미사와 전체 나눔에서는 안 의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평화에 대한 성찰이 이어졌다. 청년들은 안 의사를 독립운동의 영웅으로만 기억하기보다, 신앙인으로서 생명의 존엄과 무력 저항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던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여순감옥과 하얼빈역에서 마주한 그의 결단은 나라를 빼앗긴 시대가 개인에게 강요한 비극이기도 했다.
731부대 유적에서 확인한 이름 없는 희생자들의 고통도 나눔의 중요한 화두였다. 청년들은 평화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데 주목했다. 평화를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을 돌아보고, “미사 때마다 주고받던 ‘평화를 빕니다’ 인사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였다”는 고백도 나왔다.
이은형 신부는 일정을 마무리하며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방명록에 ‘님을 꼭 고국에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며 “우리 청년들 마음속에 청년 안중근의 의로움이 항상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안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간 나흘. 116년 전 청년 안중근이 품었던 평화의 염원은 분단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질문으로 남았다. 청년들은 11월 7~8일 파주 민족화해센터에서 열리는 ‘국제 청년 안중근 평화포럼’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 순례에서 얻은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발전시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