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영성체부터 선종까지… 수도자들이 기억하는 ‘소년 아쿠티스’

(가톨릭평화신문)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수도원
성인이 7세 때 첫영성체 받은 장소
여느 또래 아이처럼 공부하며 놀았지만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던 소년으로 기억

성인품 오른지 한달여 만에 화재 발생
성인 유해·정원·성모상은 화마 비껴가

 
정진 작가(오른쪽 세번째)가 원장 마리아 알레산드라 수녀를 비롯한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공동체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통역사 이경진씨와 봉사자 비토리오씨도 함께했다.
마리아 알레산드리아 원장 수녀(가운데)와 카를로 아쿠티스가 첫 영성체를 할 당시 원장이었던 마리아 에마누엘라 수녀(오른쪽)와 레티치아 수녀(왼쪽). 기자와 어머니가 선물한 선물(한국 전통 묵주 지갑과 아쿠티스 성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지 넉 달 만인 1991년 9월 8일. 성 가롤로(카를로) 아쿠티스는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부모를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자란 그는 일곱 살이던 1998년 6월 16일, 밀라노 북쪽 레코도 베르나가 마을의 한 봉쇄 수도원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17세기에 지은 이 수도원은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Romite Ambrosiane) 수도자들이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성체를 모신 아쿠티스는 이후에도 해마다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자들은 그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선종 직전까지 이어진 인연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은 지난해 10월 대형 화재로 크게 훼손됐다. 수도자들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보금자리를 잃었다. 이후 살레시오 수녀회(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여름철 휴양 시설로 사용하던 건물을 거처로 내줬다.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한 레코도 카시나 발사시나에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집’이다. 공동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리아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아빠티사)는 현장을 찾은 기자에게 “카를로에 관해 이야기해줄 것이 많다”며 흔쾌히 취재를 승낙했다.



아쿠티스를 기억하는 수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9월 11일 밀라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레코(Lecco)로 향했다. 40분 남짓 달려 도착한 레코역에서 원장 수녀의 부탁을 받은 현지 신자 비토리오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차를 타고 휴양소에 도착했다. 마당에 서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 성모상을 기자의 어머니 정진(로사) 동화작가가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정 작가는 현재 성 요한 보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살레시오 협력자회 교육을 받고 있다.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를 비롯한 수도자들이 마중 나와 기자 일행을 반겼다. 안내받은 면회실에는 불탄 수도원 사진과 어린 아쿠티스의 모습이 담긴 달력, 화재 속에서도 보존된 그의 심낭 조직 일부와 머리카락 성해가 있었다. 잠시 후 아쿠티스가 첫영성체를 할 당시 원장이었던 마리아 에마누엘라 수녀가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1998년 6월 16일 베르나가 수도원에서의 첫영성체 당시 일곱 살 성 카를로 아쿠티스



“순간적으로 든 마음이 아니라 진짜 열망이었어요”

“카를로는 여느 또래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영성체를 하고 나서는 정말 감격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했어요. 무언가를 느끼는 듯했고, 가만히 있지를 못할 정도였죠.”

아흔에 가까운 에마누엘라 수녀는 1998년 6월 16일 당시 일곱 살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가 처음 성체를 모시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성체에 깊은 관심을 보인 아쿠티스는 또래보다 1년 이른 일곱 살에 첫영성체를 했다. 당시 아쿠티스와 가족의 신앙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밀라노대교구 성 고데하르도(San Gottardo al Corso) 본당 주임 알도 로카텔리 신부는 그가 충분히 준비돼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아쿠티스 가족이 교적을 둔 곳은 밀라노 숨은 성모(Santa Maria Segreta) 본당이었지만, 어머니 안토니아 살차노 여사는 아들을 데리고 성 고데하르도 본당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했다.

“신부님은 아신 겁니다. 카를로가 성체를 일찍 모시고 싶어 한 것은 그저 순간적으로 든 마음이 아니라 진지한 열망이었다는 걸요.”

아쿠티스는 그의 영적 지도자였던 일리오 카라이 신부와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개인 비서를 지냈던 파스콸레 마키 대주교의 특별 허가를 받아 조기 첫영성체를 하게 됐다. 당시 은퇴 대주교였던 마키 대주교는 아쿠티스의 신앙적 성숙을 확인한 뒤, 축제의 들뜬 분위기보다 내적 집중에 도움이 되는 조용한 장소에서 성사를 거행하도록 권했다. 이에 로카텔리 신부는 인연이 있던 베르나가 수도원에 첫영성체 미사를 부탁했다. 이 공동체에서 한 어린이의 첫영성체를 거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첫영성체 당일 아쿠티스는 부모와 할머니와 함께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 공동체 전체가 참여한 가운데 밀라노대교구를 중심으로 전승된 암브로시오 예법으로 미사가 봉헌됐고, 수도자들이 고른 성체 성가를 불렀다.

첫영성체 후 아쿠티스의 신앙생활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날마다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조배를 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 무렵 아쿠티스는 자신의 ‘인생 계획’을 이렇게 적었다.

“항상 예수님과 하나 돼 있는 것, 이것이 나의 인생 계획입니다.”
 
2025년 10월 11일 화재로 훼손되기 이전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베르나가 수도원 전경. 수녀회 제공.
화재로 훼손되기 이전 베르나가 수도원 모습. 수녀회 제공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첫영성체는 아쿠티스와 베르나가 수도원의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아쿠티스 가족은 해마다 베르나가를 찾았고, 수도자들은 어린 소년이 자라면서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수도자들은 아쿠티스를 그저 ‘평범한 소년’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래처럼 공부하고 놀며 일상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에 끊임없이 응답했다는 것이다.

“카를로의 위대함은 받은 것을 하나도 헛되이 하지 않고 충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에마누엘라 수녀의 기억에는 또 다른 장면이 남아 있었다. 면회가 끝날 때면 아쿠티스는 부모를 먼저 나가게 한 뒤 수도자들에게 늘 같은 부탁을 잊지 않았다.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아쿠티스가 마지막으로 수도원을 찾은 것은 선종하기 약 3주 전이었다. 그해 10월 어느 주일 저녁, 아버지 안드레아 아쿠티스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카를로의 온몸이 부었다”며 기도를 부탁하는 전화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수도자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12일 아쿠티스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안드레아씨는 “카를로가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오히려 수도자들의 기도에 감사했다. 에마누엘라 수녀는 당시 “감사라뇨. 저희는 기적조차 얻지 못했는데요”라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카를로가 세상을 떠난 것은 주님께서 그를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를로는 훌륭하게 살았고, 죽음도 훌륭하게 맞이했으니까요.”

에마누엘라 수녀가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지금도 전율을 느낍니다. 아들을 막 잃은 아버지가 제게 그렇게 말하다니요. 그분의 심정이 어떠셨겠어요.”

아들의 선종 후에도 부모는 해마다 베르나가를 찾았고, 수도자들은 2010년에 태어난 쌍둥이 동생 미켈레와 프란체스카가 자라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성 카를로 아쿠티스가 일곱 살이던 1998년 6월 16일 첫영성체를 한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베르나가 수도원 성당이 2025년 10월 11일 화재로 훼손된 모습.
 
2025년 10월 11일 성 카를로 아쿠티스 기념일 전날 발생한 화마를 피한 베르나가 공동체의 아쿠티스의 심낭 조직과 머리카락 성해와 증명서


불길을 견딘 것들

인터뷰를 마친 뒤 공동체가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함께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칠 무렵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가 화재로 훼손된 베르나가 수도원에 가보겠느냐고 제안했다. 기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고맙게도 비토리오씨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언덕 위 수도원은 지난해 화재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쿠티스가 첫영성체를 한 성당도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수도원은 지붕과 위층 대부분이 불타 골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재는 2025년 10월 11일 저녁 발생했다. 9월 7일 아쿠티스가 성인품에 오른 지 불과 한 달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은 바로 아쿠티스의 전례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이 주일과 겹치면서 수도자들은 하루 앞서 그의 성해를 성당에 공개했다. 저녁기도 전 담당 수녀가 성해를 다시 안으로 들였지만, 평소 보관하던 위층까지 옮기지 못하고 성당과 가까운 인근 제의실에 잠시 두었다. 그 덕분에 성해는 무사했다. 화재 뒤 소방관과 시민보호대가 온전한 상태의 성해와 증명서를 찾아냈다.

화마를 비껴간 것은 성해뿐만이 아니었다. 관리인 지노씨가 수도원 옆 녹색 철문을 열자,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여러 작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한쪽에는 수도자들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진 작가와 마리아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와 봉사자 비토리오씨가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베르나가 수도원 정원을 걷고 있다. 오른쪽으로 화재로 훼손된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2025년 10월 11일 성 암브로시오 은수 수녀회 베르나가 수도원에서 발생한 화재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아 정원에 모셔진 아름다운 성모상.


동화 속 ‘비밀의 정원’ 같다며 연신 감탄하던 정 작가는 흰 성모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는 “화재를 견딘 뒤 구조돼 이곳으로 옮겨진 성모상”이라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62년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성모상”이라고 말했다. “베르나가 공동체에는 화마에서 살아남은 세 가지 보물이 있는 셈이네요. 아쿠티스 성해와 정원, 그리고 바로 이 성모상 말이에요. 이 보물들이 앞으로 제 영성의 향기가 돼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젊은 하느님의 종

베르나가를 떠나기 전, 알레산드라 원장 수녀는 또 한 명의 젊은 신앙 증인을 이야기했다. ‘하느님의 종’ 마르코 갈로(Marco Gallo, 1994~2011)다.

레코에서 성장한 갈로는 스포츠와 산을 좋아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돕고 친구들과 장애가 있는 노인들을 찾아 봉사했다. 이후 몬차로 이주한 그는 2011년 17세 나이에 등굣길 교통사고로 숨졌다. 밀라노대교구는 올해 3월 그의 시복시성 절차를 시작했다. 갈로가 선종하기 5년 전, 아쿠티스도 몬차의 성 제라르도 병원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흘을 보냈다.

“카를로는 하나의 모범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 가운데에도 복음의 표징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알레산드라 원장 수녀)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