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인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 단체의 행진을 둘러싸고 가톨릭 주민들과의 대치가 벌어졌다. 종파 간 뿌리 깊은 갈등이 다시 고조되면서 가톨릭교회와 성공회 지도자들이 평화적 해결과 화해를 촉구하고 나섰다.
갈등은 9월 27일 개신교 단체인 ‘오렌지오더’가 가톨릭 신자들과 민족주의 성향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는 가르바히 로드를 통과하는 행진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이 지역에서 1997년 이후 약 30년 만에 오렌지오더의 행진이 허용될 가능성이 열리자, 수천 명의 주민이 행진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가톨릭 신자와 민족주의자들로 이뤄진 시위 현장에는 북아일랜드 최초의 가톨릭 신자 출신 총리 미셸 오닐도 참여했다. 법원의 허가에도 주민들의 항의와 경찰의 대응 속에 행진은 결국 진행되지 못했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체 사이 해묵은 정치·민족적 갈등이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과의 연합 유지를 지지하는 연합주의 세력과 아일랜드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대립해왔다. 이러한 갈등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 성금요일 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유혈 분쟁 ‘더 트러블스’로 심화됐으며, 이 기간 3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가르바히 로드 행진 논란은 1990년대 북아일랜드 종파 갈등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오렌지오더는 1795년 창설된 개신교 단체로, 1690년 보인 전투에서 개신교도인 윌리엄 오렌지 공이 가톨릭 왕 제임스 2세를 물리친 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이어왔다. 그러나 가톨릭 주민들은 행진이 자신들의 거주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종파적 위협과 억압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며 반발해왔다. 오렌지오더는 행진 금지가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일랜드 통일 지지 발언까지 더해지며 정치적 긴장도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12일 아일랜드 방문 중 “아일랜드가 통일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통일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영국 정치인들과 북아일랜드 연합주의 진영은 북아일랜드의 미래는 외부 인사가 아니라 주민들의 민주적 의사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반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의 에이먼 마틴 대주교와 아일랜드 성공회 존 맥도웰 대주교는 9월 27일 공동 성명을 내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두 주교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강조돼야 할 때는 없었다”며 “법치에 대한 존중과 평화적·민주적 절차의 활용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안정된 민주사회를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두 주교는 “우리는 평화의 길로 나아가고 모두를 위한 더 나은 미래를 세우기 위해 요청받는 모든 일을 기꺼이 하겠다”며 양측의 신뢰와 이해가 회복될 수 있도록 포용과 화해를 지향하는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립이 이어지면서 북아일랜드 사회에서는 법치와 집회의 자유, 공동체 안전을 함께 고려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