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합계출산율이 말하지 않는 것

(가톨릭평화신문)



산업 강국이자 문화강국으로 요즘 제일 잘나가는 한국이 수십 년째 세계 최하위를 기록 중인 분야가 있다. 바로 합계출산율이다.

15~49세 가임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 통계를 볼 때마다, 나는 성별이 여자인 국민으로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올해 50세가 되며 드디어 출산의 의무에서 열외가 되고 나니 홀가분하기 짝이 없다.

저출생 위기는 내가 사는 수도 서울에서도 감지된다. 학령인구가 줄면서 집 근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3년 새 차례로 폐교했다. 매년 5월 본당의 연례행사인 생명 주일 태아 축복식은 신청자가 없어 무산될 위기다.

주변을 살펴보면 더 뚜렷해진다. 내 오랜 친구들은 저출생 현상의 표본이다. 20년 지기 친구 5명 중 기혼자는 4명이지만, 학부형은 딱 1명이다. 남편들 포함 9명이 지구에 와서 딸랑 2명을 낳은 셈이니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미션을 우리는 고작 22%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우리가 특별히 ‘한국이 싫어서’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만용을 부릴 수 없어 결혼과 출산이 늦어졌고, 뒤늦게 준비가 됐을 땐 이미 난임행 특급열차를 타고 있었다.

내가 25년간 근무한 신문사는 전체 기자 중 여성 비율이 30% 남짓했다. 해마다 여성 입사 비율이 늘어나는데도 재직 인원은 늘 30% 언저리였다. 한창 일 잘하던 선후배들이 ‘일하는 엄마’ 자리에서 부대끼다 결국 회사를 떠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육아·살림은 물론 회사 일도 ‘넘사벽’인 선배들도 드물게 있었다. 소위 뼈를 갈아 넣고 일하는 유형이다. 퇴사냐 슈퍼우먼이냐, 극단적인 양자택일 앞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선택하지 않음’을 택했다. 비혼 혹은 무자녀의 길이다.

반면 ‘일하는 엄마’로 근근이 버티는 합계출산율의 역군들은 피폐해졌다. 회사를 계속 다니면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라는 훈수를 들었고, 그렇다고 회사를 관두면 “둘이 벌어도 빠듯한 세상에”라며 걱정을 샀다. “출산이 애국”이라더니 이후 모든 극한 서바이벌은 오로지 엄마 몫이었다.

고질적인 저출생으로 국가소멸론까지 나오는 상황이지만, 교회 입장은 또 미묘하게 다르다. ‘난임 부부를 위한 보편지향기도’를 듣노라면 매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이들이 선택의 순간에 비윤리적인 보조생식술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시어 생명 존중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라는 구절이 문제였다.

교회는 인공수정·시험관 등 생명 탄생 과정에서 일체의 인위적 개입을 금지하고 있다. 난임병원에서 처음 시험관 시술을 권유받았을 때 나는 교회의 보조생식술 금지조항보다 매일 배에 주사를 맞고, 난자를 채취·이식할 일과 호르몬 교란으로 겪을 끔찍한 부작용이 더 무서웠다.

시험관 시술을 받는 이들은 위험과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며 용감하게 엄마가 되려는 이들이다. 감히 누가 등을 떠밀어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생명을 향한 여정에는 너무도 많은 눈물이 맺혀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0명이다. 1명 이하가 된 지 벌써 8년째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돕는 정책적·사회적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누가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결혼과 출산이 커리어를 건 도전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합계출산율은 다시 늘어날 수 있다.

간절히 엄마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교회의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죄짓는 두려운 마음으로 난임치료를 받지 않도록 그들 마음을 어루만지고 하느님 자비를 적극 전해야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세상을 그 누구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박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