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파로스(?μφαλ??)’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세상의 중심을 찾기 위해 두 마리의 독수리를 동쪽과 서쪽으로 동시에 날려 보냈습니다. 두 독수리는 그리스의 도시 델포이에서 만났고,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 몸의 중심을 뜻하는 ‘배꼽’이라는 말, 곧 옴파로스를 그 상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리에티(Rieti)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거의 중앙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배꼽’이라는 뜻의 ‘움빌리쿠스 이탈리애(Umbilicus Italia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에티의 특별함은 단지 지리적 위치에만 있지 않습니다.
리에티는 고대 로마가 탄생할 때 그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간 도시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8세기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군신 마르스는 어느 날 땅에 내려와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만나게 됩니다. 레아 실비아는 이후 로마를 세우게 되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레아 실비아는 순결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삼촌 아물리우스(Amulius)에게 벌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 리에티의 옛 지명은 레아에서 유래한 레아테(Rheate)로 전해집니다. 지금도 리에티 지역 사람들을 ‘레아티니(Reatini)’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리에티를 고대 로마의 어머니와 같은 도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와 리에티의 관계가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두 도시는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고, 결국 기원전 290년 로마 공화국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Manius Curius Dentatus)에 의해 리에티는 로마의 식민도시가 됩니다. 덴타투스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이미 이가 나 있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리에티는 로마식 도시 구조를 갖추며 로마 세계 안으로 편입됐습니다.
리에티가 그리스도교와 연결된 시기는 기원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의 제자로 여겨지는 성 프로스도치모(Prosdocimus) 주교의 도움으로 리에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리에티는 신앙과 문화가 함께 자라난 도시가 됐고, 중세에는 교황들이 머문 도시 가운데 하나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리에티가 경제적·종교적으로 번영을 누린 시기는 ‘교황들의 도시’로 불렸던 아나니와 더불어 교황들의 거처로 사용되던 때였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198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도 강력한 교황권을 행사한 인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교회 안에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노리오 3세 교황도 1219년과 1225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회칙을 인준해 준 교황으로 기억됩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27년, 1232년, 1234년에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전 든든한 후견인이었고,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를 성인품에 올리며 새롭게 일어난 복음적 수도운동을 교회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또 클라라 성녀와도 깊은 영적 인연을 맺었습니다.
니콜라오 4세 교황은 1288년과 1289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으로는 처음 교황좌에 오른 인물입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298년 리에티에 머물렀고, 1300년 교회 역사상 첫 성년을 선포한 교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황들이 머물렀던 중심에는 리에티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1109년부터 1225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금도 리에티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성당 왼쪽 문 위에는 리에티의 초대 주교로 공경받는 성 프로스도치모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황들이 머물던 교황궁은 주교좌성당 오른편에 붙어 있습니다. 1283년에 세워진 이 건물 2층에는 교황들이 리에티 시민들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축복했다고 전해지는 발코니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발코니 앞에 서면, 한때 이 작은 도시가 교회의 중심 가까이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에티가 누린 이 영광의 시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와도 겹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덕분에 리에티 일대는 오늘날 ‘거룩한 계곡’이라 불립니다. 실제 지형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야 지대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신앙의 기억 안에서 이곳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진 영적 계곡입니다. 이곳에는 십자형으로 이어지는 네 곳의 프란치스코 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209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시시를 떠나 로마로 가는 길에 포조 부스토네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참된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한 평화를 체험했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1223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회의 시나이산’이라 불리는 폰테 콜롬보에서 회칙을 완성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베들레헴과 닮은 마을 그레초에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구유를 마련하고 성탄 밤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성탄 구유 전통의 중요한 시작으로 기억됩니다.
1225년에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리에티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 포레스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 주님의 섭리를 드러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피조물의 찬가> 일부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리에티는 이탈리아의 지리적 중심일 뿐 아니라, 중세교회가 새로워지던 시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이 깊이 새겨진 자리였습니다. 무너져 가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을 들었던 프란치스코에게, 리에티의 네 성지는 네 개의 기둥과도 같았습니다. 그 기둥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다음 회부터 네 차례에 걸쳐, 리에티의 거룩한 계곡에 남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