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곁에 있는 이름입니다

(가톨릭신문)

가족은 늘 곁에 있던 존재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가족의 기척 속에 살아갑니다. 현관문 여는 소리, 부엌에서 들리는 물소리, 늦은 밤 돌아와 “나야” 하고 말하던 목소리. 가족은 설명보다 먼저 기척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가까워 고마움을 잊고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 삶의 바탕에는 늘 그 기척이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가족의 기척이 따뜻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상처를 남긴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이미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곁에 다시 서는 관계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신앙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신비를 다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계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고, 그들의 부르짖음 안에 계시며, 역사의 한복판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느님은 보시는 분이고, 들으시는 분이며, 아시는 분입니다. 멀리서 관찰하듯이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삶 한가운데서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은 차가운 정의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 “내가 네 곁에 있다”고 들려오는 응답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물며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사람들


삶의 바탕에 늘 함께하는 관계


가족도 그렇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고통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압니다. 말투가 달라진 것을 알고, 밥을 남긴 이유를 짐작하고, 문 닫는 소리로 마음의 날씨를 느낍니다. 가족은 서로를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다치게도 하지만, 가장 오래 기억해 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사랑은 다정한 말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묻지 않고 기다리는 침묵, 식탁 위에 남겨 둔 반찬, 무심한 듯 건네는 안부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처럼 멀리 세우지 않으시고, 친구처럼 곁에 두십니다. 교회 안에서 기억되어 온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도 이 마음을 전합니다. 가난하고 두려운 사람들 곁에서 성모님의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너희 곁에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알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는 뜻밖에 깊이 닮아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나야” 하고 돌아오는 목소리, 말없이 차려 놓은 밥상, 끝내 잊지 않고 불러 주는 이름입니다.


가족이니까 가능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곁에 있는 일입니다. 보아 주는 일입니다. 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그렇게 계시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가족이 되어 가는 중인지 모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