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에세」: 사유하는 인간

(가톨릭신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학문과 문화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설정하는 근본적 토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레오 14세 교황이 인공지능(AI) 과학 혁명 시대에 과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회칙 「고귀한 인류」를 반포했다. 가장 심각한 위험은 일자리 상실이나 허위 정보라기보다는, ‘자기 인식의 전환’에 있다. 인간이 ‘자신을 관계와 친교로 부름받은 인격체’가 아니라, 효율성을 ‘가치의 궁극적 척도’로 삼으며, 인간을 ‘최적화해야 할 프로젝트’로 환원하는 유혹이다.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유 능력을 확장한다는 의미이다. AI의 도움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지적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사유의 외주화’는 인간이 고유하게 수행하던 비판적 사고와 판단 등의 정신적 활동을 AI에 의존하거나 떠넘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본능이나 외부 환경에 이끌려 사는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와 세상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사유하는 능력은 인간 본질의 핵심이다. 레오 14세 교황의 첫 회칙이 가장 심각하게 염려하는 부분이 바로 사유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1580년 출간된 최초의 수필… 인간 내면 들여다보며 본질 성찰

사유 활동으로 불완전함 극복하는 과정과 깨달음의 의미 강조

효율 극대화 추구하는 AI 시대에 ‘인간 존엄’이라는 화두 던져

몽테뉴(1533~1592)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관으로 활동하다 1571년 38살의 나이에 자신의 영지인 몽테뉴 성으로 은퇴한다. 그 후 사색과 저술에 몰두하면서, 1580년 최초의 수필 문학으로 꼽히는 「에세」(「수상록」)를 완성한다. 프랑스 지성인들이 정신적 위기에 빠졌을 때 찾아간다는 「에세」는 생각하는 능력과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몽테뉴 성의 탑 건물을 사유의 공간을 위한 서재로 꾸민 그는 벽과 기둥에 60여 개의 그리스어와 라틴어 경구들을 새겼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오직 하나의 프랑스어 문장이 놓여 있었다. 바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이다.

 「에세」 제2권 제12장에 수록된 「레몽 스봉을 위한 변명」에서 드러나는 인간은 자신을 신적 존재로 상상하며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욕망과 충동에 이끌려 동물처럼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다움’이란 이 양극단 사이에서 사유를 통하여 신과 동일시하는 교만함에 빠지지 않고, 동시에 동물적 본능으로 무너지지 않는 중간적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신에게 속할 줄 아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인간 삶의 중심적 과제이다.

「에세」는 일반화된 한 개인의 자아 인식이 아니라, 유명하게도 몽테뉴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그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면서, 독자들에게 “정신과 의지가 바깥으로 흩어져 소진되고 있다면 그것을 다시 안으로 불러들이라”고 초대한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적 성찰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확정되고 완전한 정체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움직임들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할 어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매일매일’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지속적인 사유를 통하여 자신이 모순되고 제한되어 있고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생각의 능력은 저자로 하여금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달을 수 있게 했다.

“우리가 남의 삶이나 바깥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데 시간을 쓴다면,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결함투성이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지성적 약함이 아니라, 지성적 성숙함이다.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활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결국 자신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허구적인 모습에 위안을 받을 뿐이다.

고정된 존재가 아닌 ‘되어 가는(becoming)’ 존재로서 인간에게 사유하는 행위의 과정은 개인의 연속성을 가능케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계속 추적할 수 있는 활동이 내적 성찰이다. 성찰은 ‘되어 가는’ 자아에게 연속성을 부여한다. 20여 년에 걸쳐 집필되고 수정된 「에세」는 변화되어 온 몽테뉴의 자아에 연속성을 형성해 주었다.

특히 몽테뉴는 이성이 신체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관점을 거부한다. 내적 사유는 지식을 축적하거나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기보다는, 자기 신체와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경험에 대하여’에서 어떤 음식이 그에게 맞지 않는지, 혹은 고통을 어떻게 돌보는지 등,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진정한 철학적 대상으로 삼는다. 

이렇듯 육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유는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혁명적인 통찰을 보여 준다. 즉, 인간은 추상적 범주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고유한 신체적 특징, 특정한 고통, 개인적 역사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로서 겪어야만 하는 보편적 경험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경험들은 동시에 매우 개별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을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상황 안에서 본인이 직접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몽테뉴도 오랜 지병으로 고통받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앞에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기보다는, 고통은 사유의 동반자였다.

“나는 이 결석과 함께 살아가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위안을 찾고 희망도 찾는다.”

비록 몸의 고통은 즐거움을 앗아가지만, 사유의 힘은 고통의 체험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나는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 죽음을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결석을 통해 한 가지 유익은 얻고 있다. 스스로는 해내지 못했던 죽음과 화해하는 일을 이 병이 대신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에세」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로서 가변적이며 모순적이고 불완전하다. 둘째, 인간은 사유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AI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물을 제공한다. 과연 이 결과물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몽테뉴의 사유는 지식의 축적이나 결과물이 아니라, 사유 과정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결국 잘 살고 죽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핵심 대상으로서 인간 본질의 핵심 요소이다. 불완전함을 바탕으로 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되어 간다. 그러나 AI는 인간이 인간이 되어 갈 수 있는 그 과정을 앗아가 버리고, 효율성이 극대화된 결과물만을 제공한다. 몽테뉴가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인간성에 대한 경멸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여전히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인간은 완벽하진 않지만 사랑, 연민, 우정, 인내, 후회, 충성, 감사, 절제 등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사유의 활동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삶의 의미와 충만함은 더욱 깊어진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은 이후 인간은 성찰을 통해서 그렇게 인간이 되어 오고 있다. 만약 AI에게 사유의 힘을 내준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