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안중근의 시선으로 오늘의 평화를 고민하다

(가톨릭신문)

[중국 다롄·하얼빈 이형준 기자] 한국교회 청년들이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다롄과 하얼빈을 찾았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역과 투옥됐던 뤼순감옥 등을 직접 둘러보며, 그가 꿈꿨던 ‘동양 평화’의 의미를 되새겼다. 특히 신앙인이었던 안 의사가 의거를 결심하기까지 겪었을 고뇌와 갈등을 돌아보고, 오늘날 청년들이 추구해야 할 평화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처음 마련한 ‘2026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 1기 참가자들의 중국 연수 여정에 동행했다.

뤼순감옥,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시간을 따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다오.”

31세 청년 안중근이 남긴 유언이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다.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의 중국 연수는 안 의사의 의거 이후 행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으로 시작됐다. 첫 방문지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투옥돼 사형을 당한 중국 다롄의 뤼순감옥과 재판을 받았던 일본 관동법원이었다.

뤼순감옥에는 안 의사가 수감됐던 공간과 사형장이 남아 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이 꿈꿨던 동양 평화의 구상을 「동양평화론」에 담아냈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동양평화론」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동양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상이 담겨 있다. 청년들은 안 의사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수감실을 바라보며, 죽음을 앞두고도 평화를 고민했던 그의 삶을 되새겼다.

이어 찾은 일본 관동법원에서는 안 의사가 재판받기 위해 올랐던 좁은 계단을 직접 걸어 올랐다. 천장이 낮아 몸을 굽혀야만 지나갈 수 있는 계단이었다. 당시 피고인들이 허리를 굽히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토 저격했던 하얼빈역·투옥됐던 뤼순감옥 등 방문
미완의 「동양평화론」 돌아보며 각자 자리에서 평화 이루기 위한 노력 다짐

저격 거리 7m 남짓한 하얼빈역 의거 현장

연수 참가자들은 다롄을 뒤로 하고 하얼빈까지 약 1000km를 기차로 이동했다. 지금은 고속철도가 두 도시를 잇고 있지만, 이 철길은 1909년 안 의사가 의거를 준비하며 여러 차례 오갔던 길이기도 하다.

하얼빈역에 도착한 청년들은 역 안에 조성된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이다. 역 1번 승강장에는 안 의사가 총을 겨누고 서 있던 자리와 이토 히로부미가 총탄을 맞은 자리가 각각 세모와 네모로 표시돼 있었다. 두 지점 사이 거리는 불과 7m 남짓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워서 놀랐어요.”

현장을 바라본 청년들 사이에서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연수에 동행한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 임재근 박사는 “어떻게든 의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한 손을 뻗어 저격했다”고 설명했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진 두 지점은 의거를 준비했던 안 의사의 치밀함과 결연한 의지를 짐작하게 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고해성사를 받으려 했으나,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니콜라 빌렘 신부가 안 의사를 찾아가 순국 전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청년들은 안 의사가 의거를 앞두고 고뇌하며 자주 거닐었다고 알려진 자오린공원(옛 하얼빈공원)도 찾았다. 공원에는 2006년 세워진 ‘청초당’이라는 작은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념비에는 안 의사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지며 왼손 약지를 끊고 혈서를 썼던 단지동맹의 손도장도 새겨져 있었다. 


‘청년’ 안중근에게 오늘의 평화를 묻다

“신자였던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살생’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괴로워했을까요? 존경스러우면서도 이런 상황을 만든 당시의 ‘시대’가 정말 슬프게 다가와요.”

안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은 일제의 침략과 전쟁이 남긴 상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년들은 옛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본부와 일본군이 전쟁 포로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지도 찾았다. 또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기 전 일본군이 점령한 뤼순항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었다는 203고지에도 올랐다.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폭력과 그 흔적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역사 현장을 둘러보면서 청년들은 안 의사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꿈꿨던 동양 평화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해 갔다. 하루 일정을 마친 뒤에는 조별 나눔을 통해 현장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안 의사의 삶을 각자의 시선으로 되짚었다. 연수 마지막 날 봉헌한 주일미사에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평화를 위한 기도를 봉헌했다.

강연우(루치아·의정부교구 파주 금촌2동본당) 씨는 “역사책으로만 접했던 현장을 직접 보니 색다른 감동이 있었고,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느꼈을 감정과 떨림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며 “뤼순감옥에서는 안 의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하며 버텼는지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신지연(마르가리타·의정부교구 신곡1동본당) 씨는 “고국에 묻어 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아직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며 “독립운동가들이 힘겹게 지켜 온 평화로운 나라에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내 주변의 이웃을 사랑하는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전했다.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 참가자들은 중국 연수에 앞서 4주간 안 의사의 삶과 동양평화론, 동북아 국제 정세 등을 배웠다. 중국 연수를 마친 청년들은 11월 7일부터 8일까지 경기도 파주 민족화해센터에서 열리는 ‘국제 청년 안중근 평화 포럼’에 참석한다. 교육과 연수를 통해 마주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동북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이어갈 예정이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 이은형(티모테오) 신부는 “안 의사가 의거했던 시대에는 나라를 빼앗긴다는 절박함이 있었다면, 지금 청년들이 사는 시대는 남북 분단과 위태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시대”라며 “그래서 안 의사가 청년이었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참가자들과 함께 배우고 나눠보고자 이번 연수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는 앞으로도 매년 청년 안중근 평화학교 참가자를 모집해 교육과 연수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