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청계동 안씨 일가 안방’,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청계동 안씨 일가 안방’,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아버지 안태훈이 빌렘 신부에게 세례 요청
안중근(토마스) 의사는 2명의 아버지를 모셨다. 혈육의 아버지 안태훈(베드로)과 영적 아버지 빌렘(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다. 둘은 안 의사의 사상과 신앙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안 의사가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수양하고, 1894년 동학군과 싸우며, 가톨릭 신자로서 교육과 국민 계몽활동에 힘쓰고, 1905년 집안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의거를 한 모든 것은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안 의사는 빌렘 신부로부터 공동선과 사회 정의, 국제 사회의 연대 등 가톨릭 사상에 기반을 둔 평화론의 지평을 넓혔다. 그 집약체가 순국 직전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이다. 비록 완성하진 못했지만, 안 의사는 「동양 평화론」에서 한국의 독립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의 전제이며, 세계 평화의 실현 과정이라 했다. 그에게 있어 평화를 지키는 것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 의사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96년 12월 안태훈이 그를 찾아와 세례를 청하고 청계동공소 개설을 요청하면서다. 안태훈은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가담했다가 실패 후 황해도 해주에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피신해 은둔생활을 했다. 부인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 장남 중근·정근(치릴로)·공근(요한) 세 아들과 딸 성녀(루치아)를 낳았다.
1894년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포수 12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후 가톨릭에 입교했다.
“이런 열심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종교 운동이었다. 안 진사의 일관된 추진력과 영향력이 다방면에서 효과를 발휘한 덕분임이 분명했다. 여러 사람이 보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리서를 베껴 써서 다른 이들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데 힘을 보탰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95쪽)
빌렘 신부는 1897년 1월 청계동을 방문해 안태훈 가족을 비롯해 33명에게 세례를 줬다. 또 그해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청계동에 와서 66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영세자가 100여 명에 달하자 안태훈은 청계동에 공소를 지었다. 이를 계기로 1898년 청계동에 본당이 설립됐고, 초대 주임으로 빌렘 신부가 부임했다. 이후 청계동본당을 중심으로 황해도 지역 복음화가 놀랍게 성장한다. 600여 명이던 신자가 4년 만에 7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복음화율은 당시 조선대목구에서 으뜸이었다.
안중근 일가는 전교에 앞장섰으며, 빌렘 신부는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해 지방관의 탄압으로부터 안중근 일가를 보호했다. 이 시기 20대 안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 활동하다 1905년 아버지 안태훈이 선종하자 진남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교육으로 부국강병의 뜻을 펼치겠다며 가톨릭계 중등학교인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외세 침략에 대응하고 민족과 교회의 발전을 이루는 최선책은 고등교육을 강화하는 것뿐이라 확신하고,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하게 되면 교회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견을 꺼내지 말라”는 뮈텔 주교의 단호함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종교적 가치관과 자기 민족 의식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후 안중근의 신앙생활은 민족의 양심과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유지됐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이 1907년 해외로 망명한 후에도 그의 가족과 연을 지속했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빌렘 신부와 복사 안 요한’,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빌렘 신부, 종부성사 주러 여순감옥 방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안 의사는 1910년 2월 17일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에게 각각 전보를 보냈다. 죽기 전 종부성사를 받기 위함이었다. 뮈텔 주교는 살인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으니 종부성사를 줄 사제를 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2일 중국 여순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910년 3월 8일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면회했고, 안 의사는 무릎을 꿇고 큰 절로 인사했다.
안 의사는 다음날 빌렘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3월 10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영성체를 했다. 안 의사는 빌렘 신부에게 “아들 분도를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3월 26일 순국했다. 안 의사와 빌렘 신부는 이 만남 동안 정치 문제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둘은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룩한 전례 안에서 장엄한 성사에만 집중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을, 성모님의 비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빌렘 신부는 이 일로 2개월 성무집행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는 1911년 연말 보고서에서 안중근에게 성사를 집전한 것은 사제로서 당연한 의무이고 정당한 일이라며 뮈텔 주교에게 항의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교황청 포교성성에도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1913년 7월 교황청 포교성성은 뮈텔 주교에게 빌렘 신부의 여순행 요청을 거절한 것과 성무집행 정지를 내린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일로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를 비롯한 조선 선교사들과 관계가 악화돼 1914년 2월 프랑스로 귀환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빌렘 신부가 사목하는 황해도 청계동성당을 방문해 안중근 일가를 촬영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아카이브에 소개된 ‘청계동 안씨 일가 안방’<사진 1·2>은 한 장의 사진을 인물에 따라 둘로 분리해놓은 사진이다. 베버 총아빠스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선 ‘안 진사의 방’으로 소개되고 있다. 당시 청계동에서 ‘안 진사’는 말 그대로 진사시에 합격한 안태훈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는 1905년 사망했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 속 주인공은 아마도 안태훈의 형 안태진과 그 아들, 손주가 아닐까 싶다.
<사진 4> ‘빌렘 신부와 안중근의 형제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안중근 의사 형제들도 독립운동가로 활동
베버 총아빠스는 ‘빌렘 신부와 그의 복사 안 요한’<사진 3>을 촬영했다. 서랍이 달린 책상 위에 탁상시계가 있고, 벽에 ‘삼위일체(三位一體)’와 ‘구세탄생(救世誕生)’이란 글귀가 새겨진 성화가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빌렘 신부 집무실에서 촬영한 듯하다.
복사 안 요한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다. 그는 안중근이 1905년 청계동을 떠난 이래 줄곧 빌렘 신부의 복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프랑스로 귀환할 때 그도 함께 갔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간첩’ 누명을 쓰고 수감 생활하는 고초를 겪고 추방되기도 했다. 이후 베를린에서 두부 장사를 하며 독립자금을 후원했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남승룡·김용식 등 한국인 선수들을 초대하는 등 독일 한인사회의 주요 인사였다. 그의 집 안방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사진 4>는 빌렘 신부와 안중근 의사의 형제들이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다. 빌렘 신부 옆에 앉아 있는 이가 안 의사의 첫째 동생 안정근이고, 바로 뒤에 서 있는 이가 안공근이다. 전통 일본식 복장을 한 이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야고보)이다. 안정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그의 차녀 안미생(수산나)이 김구 선생 장남 김인과 혼인해 두 일가가 사돈 관계가 된다. 안공근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관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한인애국단원으로 활동하다 충칭에서 암살됐다. 안명근은 데라우치 일본 총독 암살을 도모하다 1911년 ‘105인 안악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7년 중국 길림에서 전염병에 걸린 공소 신자들을 돌보다 선종했다.
리길재 베드로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