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갈등 없는 화해는 가짜다(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가톨릭평화신문)
내란 사태의 후유증이 너무도 크다. 민생은 무너져내려 살길은 막막하고, 공동체의 가치도 삶의 미래도 흔들린다. 사법·검찰·정부의 권력 엘리트들이 부끄러움 없이 저지른 무책임은 ‘민주공화국’에 사는 국민들의 긍지를 한 번에 무너뜨렸다.
자신들의 사익과 욕망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 복리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 고위 관료들과 사법 권력을 용인한 결과가 이렇다. 오랜 세월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는 우리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취약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걷어내고 앞으로 가야 할 지도를 바로 그려야 하는 어려운 일이 앞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이 혼란의 한가운데 성급하게 정치적 화해를 호소하는 일은 안으로부터 붕괴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치유와 쇄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치유는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정의와 진실과 신실함이 그 안에 없다면 모두 가짜다. 입장이 다른 모든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일치하고, 혐오와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
오히려 우리는 불의를 저지른 이들, 불의를 묵인한 이들과 싸워야 한다. “억압하는 자를 사랑하는 좋은 방식은 (?) 그가 억압을 멈추게” 돕는 것이며 “그를 변질시켜버린 권력을 내려놓게” 하는 노력이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241항 참조) 참다운 화해는 갈등을 피해 갈 수 없다.
갈등은 일치의 실패가 아니며 심리적·사회적 현상만도 아니다. 갈등은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필수 조건이다. 갈등은 받아들이고 어루만져야 할 상처다. 갈등은 그리스도의 몸에 선명하게 그어진 우리의 상처다. 제자 토마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을 대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을 온전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는 인간의 분노와 분열의 흔적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한 몸을 만날 수 있는 때는 그분 상처로 우리의 상처를 감싸안은, 그 상처 입은 몸에 더 밀착해 가깝게 다가갈 때뿐이다. 삶의 아픈 곳을 만지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기에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더욱 깊게 다가갈 수 있다. 갈등을 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피하는 것과 같다.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에 의해 미사 도중 살해된 성 오스카 로메로는 이 상처에 깊숙이 손을 댄 사람이다. 그는 대주교로서 사목하는 동안 교회 안팎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로메로가 바랐던 것은 단지 갈등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마주하며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는 “갈등이 있다. 하느님께 찬미드린다! 아픈 부분을 건드리면 갈등이 생기고,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고 말했다.
로메로는 적대자들의 공격에 자신을 드러내며 취약함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자신과 갈등하고 있는 이들 한가운데 살았으며, 다른 이들도 그 자리에 머물도록 손을 내밀었다. “위기 안에서 살아가며, 주님께 대한 헌신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이들은 복되도다”라면서 심각한 갈등 속에서도 쓰라린 마음에 물들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
평화와 화해는 길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화해는 하느님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과 허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며, 평화를 부수어버린 반민주주의 세력에게 불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참된 일치는 갈등을 가로지르는 진실함과 용기에서 온다. 왜 정직하게 갈등 안으로 뛰어들어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대보라 말하지 않는가? 왜 내용 없는 공허한 화해를 먼저 말해야 하는가?
박상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