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가톨릭신문)

예전에 살던 시골집 주차장에 전 주인이 심어놓은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었다. 거의 30년은 더 넘을 수령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릴 만큼 꽃이 오래가는 나무이다. 배롱나무는 꽃들이 몸살을 하는 장마 기간에 꽃을 피우는 몇 안 되는 귀한 나무였다. 이층 창에서 바라보면 흰 레이스 커튼 사이로 어리는 창밖의 진분홍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꽃들이 모두 잠시 쉬어가는 장마철 무렵 배롱나무는 꽃을 피웠다. 


그리고 정말 거의 거짓말 보태서 백 일 동안 피어 있었다. 처음에는 고맙고 기뻤다. 그런데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나는 그 진홍빛 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진하디진한 진홍빛도 내 싫증에 한몫을 더했다. 연하고 하얀 꽃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꽃을 좋아하는 내가 종국에는 차 보닛 위로 떨어져 내린 꽃잎들을 쓸어내리며 ‘오래오래 피는 꽃이라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 회의하기 시작했다.


지금 사는 곳에 집을 짓고, 정원을 마련하고, 나는 백 가지 꽃을 심었다. 아름다웠다. 아침마다 정원에 나가 물을 주며 살펴보노라면 하느님에 대한 찬미가 절로 나왔다. 이 빛깔은 어디서 왔을까, 이 연하디연한 고운 꽃잎은 어떻게 저 죽음 같은 딱딱함을 이기고 여기로 나왔을까 싶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 집에 온갖 꽃들이 다 있는데 남쪽 지방의 명물인 배롱나무가 없네. 현관 옆에 배롱나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하고. 나는 손을 내젓는다. 의아한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겪어보세요! 꽃이 백일이나 빨갛게 피어 있는 것을요.”


올해는 우리 집 정원에 30그루나 있는 키가 큰 동백들이 다른 어떤 해보다 꽃을 잘 피워 나는 아직도 눈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역시 꽃은 꽃이라, 한 나무의 꽃이 열흘이 가지 않는다. 정원을 가꾼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나로서 말하자면, 꽃이야말로 딱 열흘이 적당한 수명이다. 그러므로 내가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은 세간의 사람들이 영화의 허무함을 일컫는 데 쓰이는 것과는 달리 하느님의 멋진 설계를 일컫는 단어이다.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안부를 주고받다가 나는 말하곤 했다. “우리 집에 동백 피었어. 우리 집에 수선화 피었어. 우리 집에 사과꽃 피었어. 우리 집에 금목서 꽃 피었어. 보러와.” 그들은 대답한다. “아 보고 싶다. 가고 싶다.” 그러나 실제로 보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바쁘기 때문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벚꽃잎이 일제히 떨어져 꽃비가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찬란한 봄날도 일 년의 딱 하루, 길면 이틀이다. 


꽃보다 고운 낙엽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며 아름다운 한해의 마감을 알리는 멋진 가을날도 일 년 중 하루, 길어야 이틀이다. 해마다 꽃이 질 때면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꽃들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하고. 당신은 일생에 몇 번이나 일제히 지는 꽃잎들과 일제히 지는 낙엽 비를 보았나?


진저리가 날 정도로 씽씽하고 반들거리고 흠 하나 없는 것들은 다 가짜이다. 진짜들은 가끔 시들고, 가끔 흠 있고, 그리고 허망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선종 소식 앞에 눈물을 흘리며 나는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멀리서나마 흠모한 교황님이셨는데, 한 번은 꼭 뵙고 싶었는데, 너무 빠르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이 허망함을 찬양한다. 가고 있는 이 봄날을. 그리하여 내 영혼에 말해본다. 이 허망함을 누리자. 있을 때 보고 사랑하자, 카르페 디엠!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