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과 금육 사이

(가톨릭신문)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첫 문장이다. 소설에서처럼 우리 사회에는 아직 ‘채식주의자’라 하면 ‘별나다’라는 시선이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채식을 하는 인구가 250만 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채식을 낯설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다. 성지를, 교회사를 취재하다보면 ‘채식’에 관련된 신앙선조들의 일화를 많이 접할 수 있다. 신앙선조들은 특정 시기, 특히 사순 시기가 되면 채식주의자로 변모했다. 거기에 단식도 곁들였다. 신자들의 채식은 비신자들, 박해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신유박해 당시 충주목사 이가환은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선비들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해자들은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 줄을 알았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채식을 했기 때문이다. 그 별난 채식을 우리는 ‘금육’, 소재(小齋)라 한다.


금육도 채식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행위는 같다. 세상이 ‘별나다’고 여기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금육과 채식은 다르다. 우리의 금육은 그저 건강이나 동물권이나 환경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금육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첫 미사 강론에서 말했듯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동정심 많은 비정부기구(NGO)에 불과하다.” 이번 사순 시기, 우리 신앙은 채식과 금육 사이 어디쯤 서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디에도 서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