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의 고갯길, 시련과 고통의 역설적 은혜로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감각을 곤두세운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시작하는 사순 시기의 독서들은 꾸중으로 들리다가도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아내의 다그침 같기도 하다. 마음을 다독이는 따뜻함이 묻어 있으니, 겉은 바삭해도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감칠맛이라고나 할까.
나는 종종 월요일 새벽미사에서 독서 봉사를 한다. 언제 자리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맏물 봉헌에 대한 경외심이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다. 새벽미사에 오신 분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목소리의 피치를 가다듬고, 끊어 읽기의 마디 간격을 조율하고, 코에 걸친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게 나사도 조이고, 거울을 보며 입성도 살펴보고….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독서 내용을 대여섯 번씩 반복해서 읽다가, 불현듯 말씀의 내용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내가 읽게 된 제1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방주’ 부분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신 말씀이었다.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창세 7,2-3)
노아의 배에 올라 살아남게 된 여덟 쌍의 목숨들 중에 왜 부정한 것이 한 쌍 뽑힌 것일까? 세상의 혼탁함을 야기한 주범이었을 이 부정한 것들의 존재가치를 하느님은 어떤 관점에서 여전히 인정하시고, 새 판을 짜는 세상에다 동참시키려 하셨는가 말이다.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구글에다 ‘7:1의 비율’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어라? 이건 또 뭐지?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던 빅뱅 때에는 양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1:1이었다가, 점차 안정기에 들면서 그 비율이 7:1로 바뀌었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검색 페이지의 맨 윗줄에. 그 옛날 창세기의 저자가 첨단 천문학적 지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신기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었다.
‘칠대일, 칠대일, 왜 그랬을까? 7:1….’ 며칠을 입에 달고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아마도….’ 그 ‘아마도’의 물음표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반고비도 무한반복으로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릎을 쳤다.
‘맞다! 1의 역할이 7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구나!’
미꾸라지를 키우는 도크에 천적인 메기를 풀어두면 미꾸라지가 살아남기 위해 민첩해지고 튼튼해진단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될 빌미를 주었다는 억측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화 노력을 통해 창조주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도 일곱 번쯤은 내 뜻에 맞았고, 한 번쯤은 참아내야 하는 시련이 왔던 거구나! 5:5는 균형이 아니고 대립이며 분열이었지! 그러고 보니 사순 시기의 날 수도 1년의 1/8인 7:1이 되는구나! 그러니, 지금의 시련도 1의 시간, 곧 7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거구나!
이 엄청난 유레카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단초였고, 내 몸에 내장된 소중한 유전자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풍경화를 그려내는지 상상하게 하여, 마음속에 따뜻하고 동그란 여백을 지어주었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매일미사의 은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었고.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