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빈 평화칼럼]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가톨릭평화신문)

봄이다. 봄꽃은 수줍은 자태를 드러내고 산천초목은 새싹을 틔운다. 겨우내 땅속에서 움츠렸던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농부들은 농사를 준비하고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새로운 배움에 도전한다. 봄은 모든 피조물을 설레게 하는 ‘희망’의 계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봄이 오지 않았다. 지난해 초겨울, 느닷없이 몰아닥친 비상계엄 폭풍우는 불신과 증오의 빙벽을 쌓았다. 좀처럼 녹지 않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극우든 극좌든 이념의 벽이 너무 높기만 하다. 민심은 여전히 차디찬 한겨울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 2004년 4월 11일. 국회의 탄핵 소추로 ‘정치적 칩거’를 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들을 불러 북악산 산행을 했다. 직무 정지 31일째, 총선을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그날 노 대통령은 자신의 처지를 ‘춘래불사춘’이라는 말로 에둘러 소개했다. 정치적·법적 심판을 거쳐야 비로소 봄을 맞을 것이란 심경의 표현이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 그림자(달빛)를 쫓아가는 느낌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심판 5차 변론에서 비상계엄은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계엄이었다고 주장하며 한 비유다. 이 말은 최후 진술에서도 반복됐다. 계엄 당일, 그날의 달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계엄군 헬기의 출동이 왜 지연됐는지 더 높은 하늘에서 지켜봤다. 그날의 달빛이 먹구름을 뚫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를 다시 비춘다. 그런데 그 빛은 슬픔의 빛이 아닌 ‘희망의 빛’이다.

계엄으로 삶은 팍팍해졌고 정국은 불안하고 세계는 혼란스럽다. 민심은 흉흉(洶洶)하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각자도생 제 살길만 찾는다. 공존·공생·공화·공영의 ‘함께 공(共)’이 사라지고 있다. 지겹도록 남 탓만 한다. 거짓 앞에 진실은 맥을 못 춘다. 오히려 거짓과 가짜가 생존의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울어도 함께 울고, 웃어도 함께 웃자. 이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을 줄여 나를 비우자. 처지를 바꿔 생각하고 배려하며 서로를 섬기자. 재물도 용기도 희망도 나누며 함께 살자. 그래야 공멸을 막을 수 있다.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금기(禁忌)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금단(禁斷)이 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한 점 부끄럼 없는 양심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 시기이다. 양심을 성찰해 회심하고 참회와 희생으로 속죄를 실천하는 시간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과 수난은 무엇인가? 무너지는 정의와 공동체를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순 시기에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가 종종 쓰는 가면을 벗고 광란의 돌진을 늦추고 우리의 삶과 현실의 진실만을 받아들이자!” 계엄 이후 ‘거짓의 가면’을 쓴 이들이 법치를 부정하고 국민을 갈라치고 있다. 거짓이 증오를 낳고 증오가 폭력을 불렀다. 다시 교황의 말이다. “삶은 연기가 아니다. 거짓과 허구의 무대를 허물고 진실과 정의·화해의 무대로 돌아와야 한다.”

민주 정치의 핵심이자 권력 견제 시스템인 삼권 분립(입법·사법·행정)이 흔들리고 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견제가 오만을 잉태하고 독재의 망상을 낳았다. 바로잡고 고쳐야 희망을 키울 수 있다. 희망은 거저 오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슬픔을 억누르고 포용해야 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필한 첫 자서전 「희망」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행동을 위한 미덕이자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모든 이는 영원한 봄날에 꽃을 피우려고 태어납니다.” 희망을 품어야 비로소 우리에게도 봄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