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굽은 백발 할머니가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딘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왼손으로 의자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밀어 제대 쪽으로 나아간다. 걸음마다 정성이 담겼다. 제대 앞에 다다른 할머니는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기도를 드린다. 5분쯤 지났을까. 한 신자가 할머니를 부축해 자리로 안내한다. 오전 10시 평일 미사까지는 아직 1시간도 넘게 남았다.
사순 시기 동안 매일 이어진 십자가의 길. 대성전에 설치된 보청기를 귀에 꽂은 할머니는 여느 신자들과 다름없이 기도를 바친다. 다리가 아파 앉아있는 어르신들도 보이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꼿꼿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하는 제12처에서도 무릎을 꿇는다.
이순성(안나, 서울대교구 우이본당) 할머니는 1924년 10월에 태어나 지난해 만 100세를 맞았다. 1925년, 겨우 한 살이었을 때 세례를 받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백 년의 세월을 신앙의 품에서 살아왔다. 세례와 견진, 혼인성사까지 충남 예산에 있는 대전교구 예산오리성당(현 예산성당)에서 받았다. 1942년 4월 남편(고 신병규 베네딕토)과 혼인성사를 받은 후 자녀 여덟 명을 낳아 길렀다. 이후 박해 시대 교우촌이었던 도고성당에 교적을 두고, 논밭 일을 하며 자녀를 키웠다. 막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홀로 쌀농사를 지으며 신앙에 의지한 채 살아왔다. 여덟 자녀와 매일 한 시간씩 무릎 꿇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바쳤다.
할머니는 성당 바로 옆에 산다. 성인 걸음으로는 스무 걸음 남짓이지만, 할머니 발걸음으로는 10분도 넘게 걸리는 거리다. 집 앞 계단엔 손잡이가 없어 할머니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아기처럼 기어오른다. 집 창문 너머로는 성당 마당이 내려다보인다. 할머니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예수 성심상을 향해 깊이 인사한 후 기도를 바친다.
이 집은 함께 살던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서울에 사는 자녀들이 할머니를 서울에 모시기 위해 마련했다. 할머니는 15년 전까지 도고성당 사무장이었던 막내아들과 아산시 도고면에서 함께 살았다. 막내 아들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할머니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가시가 박혔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자녀들의 성화에 할머니는 ‘성당 옆 집’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할머니는 “성당 가는 낙으로 산다”며 “그저 죄 많은 저를 용서해달라고, 막내아들한테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사를 거르지 않는 할머니는 “성체를 모시러 성당에 안 가면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했다. 매일 평일 미사에 참여한 후 집으로 돌아오면 가톨릭평화방송을 튼다. 하루 세 번, 방송 미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리모컨은 평화방송에 고정돼 있다. 다른 채널로 바뀌지 않게 리모컨 버튼을 모두 떼어내고 테이프로 감아놓았다. 물론 성당에 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한겨울, 성당에 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뼈에 금이 가기도 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본당 공동체는 요양보호사 없이 홀로 생활하는 할머니의 안위를 챙기고 있다. 본당 수녀는 할머니 집 현관문 비밀번호도 알고 있다. 우이본당은 올해 세례 100주년을 맞은 할머니를 위한 축하 자리를 계획 중이다. 셋째 딸 신 일미나씨는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 신자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어머니가 그 낙으로 오시는 것 같다”며 웃었다.
우이본당 주임 박준호 신부는 “나이가 들면 신앙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신자들이 많은데 삶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은 신앙인의 큰 기쁨”이라며 “한국 교회의 많은 신자가 안나 할머니의 신앙을 본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