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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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교황은 역대 최장인 38일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퇴원한 후 공개 일정을 수행해 건강회복에 대한 기대를 키웠지만 끝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주님 부활 대축일 이튿날 하느님 품에 안겼다. 베드로 사도의 제266번째 후계자였던 교황은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이면서 남미 출신의 첫 교황,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다. 교황은 2013년 즉위부터 선종까지 12년간 사도좌로서 모두를 끌어안았다.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교황은 교황명으로 처음 ‘프란치스코’를 택했다. ‘평화의 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기 위해 권위와 격식을 버렸다. 스스로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했다. 가난한 이와 난민·이주민·어린이·노인·성소수자 등 약하고 소외된 이를 위해 헌신했다.
난민과 기후변화 등 사회문제에도 경종을 울렸다. 특히 환경 파괴가 인간 탐욕과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천명하며, 2015년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했다. 교황은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금세기는 엄청난 기후 변화와 전례 없는 생태계 파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며, 이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오래도록 기억될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평화를 갈구한 지구촌 지도자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적극 나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선교·복음화를 위해 바티칸의 구조 개혁을 단행하고, 성직자의 교회 내 아동 성추행 사실 공개와 사과, 이혼 후 재혼자에 대한 성체성사 허용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교황은 모든 세대를 잇는 소통가였다. 교황은 미래 세대의 성장을 위해 ‘세계 어린이의 날’을, 노인은 세대 간 연결 고리이자 신앙의 전수자라며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각각 제정했다. 또 청년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세계청년대회(WYD)를 각별히 챙겼다. 교황은 시노달리타스를 통해 교회 내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 개혁가였다.
교황은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했다. 2014년 8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및 윤지충 바오로 등 124위 시복식 집전을 위해 닷새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 등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남북 간 화해를 강조하며 한반도 평화를 기원했다.
교황의 삶을 관통하는 언어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평화를 향한 신념’이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 앞에 가장 먼저 다가섰다. 분명한 언어로 전쟁과 폭력에 맞섰다. 신앙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삶 자체로 보여줬다. 유다교와 불교·이슬람 지도자들과도 만나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부활 메시지는 “우크라이나·가자지구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는 교황이 보여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 ‘생태적 회개를 실천하는 교회’ ‘시노달리타스 교회’ 등을 구현해야 할 시대적 과제 앞에 섰다. 타인에 대한 관심, 약자를 위한 연대, 무관심을 넘어서는 민감함, 평화·정의를 선택하는 신앙의 실천이야말로 그가 세상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이는 신앙인들이 삶으로 드러내야 할 덕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돼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걸어간 길을 따르고, 교황이 남긴 유산을 실천함으로써 그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