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홍택의 중고로운 평화나라] 멸치볶음과 꼴뚜기

(가톨릭평화신문)

얼마 전 갑자기 머릿속에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시던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물론 지금도 멸치볶음은 우리의 밥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반찬이지만,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멸치볶음에는 지금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특별재료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꼴뚜기였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하찮게 여겨지는 이 연체동물은 자신보다 더 자잘한 멸치 무더기 사이에 묻혀있을 때는 위풍당당한 위엄을 뽐내곤 했다.

나는 이 멸치볶음 사이에 섞여 있는 꼴뚜기를 골라 먹는 게 좋았다. 맛을 떠나서 퍽퍽한 건빵 사이에 들어 있는 별사탕을 골라 먹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꼴뚜기는 어머니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따로 넣으신 음식재료가 아니었다. 내가 먹은 꼴뚜기들은 우연히 멸치들과 함께 잡혀서 밥상에 오르기까지 걸러지지 못한 이물질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인이 되고나서는 멸치볶음에서 꼴뚜기를 발견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물질을 선별하는 기술이 훨씬 정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수작업이 아니라 풍력과 자력을 이용하고 광학 이물선별을 거친 공산품 멸치에 꼴뚜기가 섞여 들어갈 자리는 없다. 위생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기쁨을 주던 작은 틈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쉽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세상사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철저히 분류되고 선별된다. 정답과 오답, 합격과 탈락,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 사이의 여지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정해진 잣대로 옳고 그름이 구분되면 체계적이고 정돈된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는 논쟁적 세상만이 남았다.

이 칼럼란의 제목인 ‘중고로운 평화나라’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진 한 중고 거래 사이트의 갈등적 상황을 패러디한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의 변형이다. 역설적으로 더 이상의 새로움과 포용력을 잃어버린 불편함이 남아버린 우리 사회에 대한 단상이기도 하다.

AI가 더 획기적인 정확성을 획득해갈수록 ‘정답과 다르거나’ ‘효율성 혹은 우월함과 거리가 먼’ 무언가는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전화 통화 규칙 안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누던 “여보세요”와 같은 인사말조차도 불필요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구분 짓기’와는 거리를 두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4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하셨다. 또 2013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교회 안에서는 노인·약자·주변인 등 누구도 배제되지 않으며, 모두가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임을 강조하신 바 있다.

앞으로의 세상이 승자로 남기 위해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이물질을 더 열심히 거르고 구분 지을 때, 우리 교회는 오랜 기간 하찮고 작아서 어물전 망신만 시킨다고 비난받고, 이제는 고도로 발달한 이물선별기에 걸러져서 우연이란 이름으로도 식탁에 오르기 힘들어진 꼴뚜기 같은 존재를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전혀 새로운 행동이 아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남기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