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아름다운 노년의 삶

(가톨릭평화신문)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음식, 익숙한 소리, 익숙한 주제, 그리고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관계까지. 그 이유는 반복적인 경험들의 공통된 특징에 근거한 일종의 해석 틀이라 할 수 있는 ‘인지 도식(schema)’이 우리 머릿속 기억 저장소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인지 도식은 언제든 수정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한 번 만든 인지 도식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지 도식을 수정해 새로운 인지 도식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지 도식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완고하게 행동하게 하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한편, 익숙하고 반복적인 것들이 늘어날수록 삶에서 새롭고 신기한 것들은 점점 줄어든다. 익숙함은 삶에 편리를 주는 대신 삶의 즐거움을 빼앗는다.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삶의 속도를 빨라지게 한다. 특별히 집중하고 기억할 만한 것이 없는 익숙한 시간은 빠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지혜에 갈급한 노년, 평화롭고 신앙심이 깊고 유익하며 기쁜 노년”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결과인 이 익숙함을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 익숙함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지만, 성장과 지혜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책 「신기관(The New Organon)」에서 곤충에 비유해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제시했다. 첫째, ‘개미형’ 인간은 땅만 보고 달리는 개미처럼, 부지런하지만 자기들끼리만 잘 뭉치는 ‘개인주의적 인간’이다. 두 번째, ‘거미형’ 인간은 일은 안 하고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걸린 먹잇감의 피를 빨아먹는 ‘이기주의적 인간’이다. 마지막은 ‘꿀벌형’ 인간으로, 꽃가루를 옮기며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이들은 만든 꿀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는 ‘이타주의적 인간’이자 사회에 꼭 필요한 인간형이며, 새로운 꽃을 찾아다니고 꿀을 따는, 즉 익숙함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창조해나가는 인간이다.

익숙함을 끊어낸다는 것은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삶이다. 경험을 재료로 삼되,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새롭게 창조하고 성장해나가는 삶이다. 그리고 그 도전과 성장을 통해 얻은 결과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하는 삶이야말로 꿀벌의 삶처럼 창조적이고 이타적이며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 아닐까?

노년을 익숙함에 매몰되어 쇠퇴와 한없는 기다림의 시기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익숙함을 끊어내고 인생에서 얻은 지혜를 재료 삼아 달콤한 꿀을 만들어내는 삶, 그 꿀을 다음 세대 및 사회와 함께 나누는 창조와 지혜의 노년을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젊어서는 사회적 성공과 가족의 생계, 자녀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익숙함에 길들여져야 했다면,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년에는 익숙함을 끊어내고 창조적이고 이타적인,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당신 자신과 가장 닮은 모습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