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된 조카 윤슬이는 내가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 왼쪽 발을 몰래 만지고 갔습니다. 그러곤 시치미를 뚝 떼고 다른 데 가서 공놀이를 시작했지요.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요. 말없이도 통하는 애정의 언어였습니다. 베로니카는 정말 잘 놀고, 또 정말 잘 웃습니다. 놀이를 스스로 개발하고, 환호성은 끝이 없습니다.
외할머니의 걸레질을 한참 지켜보더니 자기도 조그만 손으로 걸레를 밀고 다녔습니다. 삐뚤삐뚤하지만 어찌나 진지하던지요. 세상을 정화하듯 바닥을 밀면서 계속 웃었지요. “꺄~ 꺅꺅 흐흐흐.” ‘윤슬’ 이름처럼 밤낮으로 빛나는 아이,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처럼 사랑 안에서 용감한 아이. 이 조그만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응답입니다.
어딜 가나 “영특하다”는 말을 듣고, 유아세례 때에도 “너는 커서 수녀 되어라”는 속삭임을 들은 조카입니다. 사실 저는 이 아이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기도문을 지어 매일 바쳤습니다. 공부 잘하게 해달라는 말도, 커서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말도 없이, 그저 사랑을 알고 용감해지고 빛 가운데 살아가게 해달라고. 그래서인지 아기는 웃음으로 대답하고, 놀이라는 기도로 세상을 축복하고, 마음을 쓰다듬을 줄 압니다.
태아 기도문을 써달라 청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자매님의 딸이 시집간 일가에는 신부님이 되실 분이 있지요. 그 가정에는 축복의 입술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에, 감히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진심을 담아 하느님께 살포시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를 드렸어요.
병자의 기도는 자신을 구하지 못하기에 오히려 가장 깊은 기도가 된다는 것을. 자기를 위해 싸우는 대신 이웃과 가족을 위해 울음을 삼키고 기도하는 사람. 저는 오늘도 병상에서 누군가를 위한 화살을 하늘로 올립니다.
저는 여동생이 아기를 가지면 태아 기도문을 씁니다. 그리고 출산일까지 어머니와 함께 묵주기도 지향으로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새 생명을 맞아들이는 환대’로서, 엘리사벳처럼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가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축복으로 오신다고 믿습니다. 여동생이 둘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또 태아 기도문을 지었지요. 아기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볼 때, 생명을 맞아들이는 환대로서 신앙인이라면 아기를 위한 기도문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하겠지요.
첫 조카가 태어나자마자 축하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둘째에게도 세례명을 짓고, 부성의 마음으로 편지를 쓸 것입니다. 탄생과 첫영성체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지나치게 조용히 넘기는 분위기를 안타깝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탄생을 더 적극적으로 기념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우리 안의 무관심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지요.
아기는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비 앞에서 감사보다는 계산을, 환대보다는 조건을 먼저 두곤 합니다. 예비하심을 망각하면, 신앙은 점차 기복으로 굳어가고 주님 현존은 디올백이나 평판처럼 소비되기 쉽습니다. 교만한 마음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묵주기도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다섯 신비와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묵주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천주교인이 아니죠. 인색함이란 기도가 끊어진 데에서 오고, 첫 자리에 하느님을 박탈하고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올라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힘과 희생을 통한 자비심도 사라지고 맙니다.
외아들의 울음소리, 어머니의 환희로 가득 찬 얼굴을 관상해 봅시다. 두 성심의 도움으로 생명을 대하는 찬미와 감사가 되살아날 것입니다.
신선비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