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성벽이지만 쉽게 근접할 수 없는 내재적 위용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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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와 함께 수원 화성으로 소풍

바람에 거닐기(消風, 소풍) 딱 좋은 절기다. 봄바람은 온 땅에 새 생명의 싹을 틔울 만큼 따사롭다. 마치 온기를 품은 날숨 같다. 온기를 잔뜩 머금은 입김이 얇은 갈대 청에 공명을 일으켜 대금의 청아한 소리를 만들 듯 하늘하늘 스치듯 불어대는 봄바람이 여인의 마음은 물론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의 기운을 흔들어 깨운다.

1911년 2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역시 금수강산의 실경에 취해 봄바람을 거닐었다. 봄의 길목에서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이번 호부터 2회에 걸쳐 베버 총아빠스와 함께 수원 화성 봄 소풍을 떠나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원 화성 사진은 1907년 3월 독일인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가 촬영한 것이다. 그는 보병 중위로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러일전쟁 후 한국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방한해 15점의 수원 화성 사진을 남겼다.

일본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 또한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촬영한 수원 화성 유리건판 사진 24점을 촬영했다. 그는 조선 총독부의 후원으로 1902년부터 1934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사진에 담았다. 그는 이 사진들을 모아 「조선고적도보」 15권을 펴냈다.

일제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본 이들의 사진과 달리 베버 총아빠스는 그가 즐겨 그리던 수채화처럼, 또 그가 사랑했던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처럼 한국의 자연을, 수원 화성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편견 없이, 있다면 한국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 촬영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수원 화성을 촬영한 여느 사진보다 더 온화하고 인간미를 풍긴다. 수도복 자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봄바람을 느끼며 그 생명의 날숨을 앵글에 포착한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28일 수원에 도착해 다음날 화성을 둘러봤다. “국도를 따라 걷는다. 노폭이 5m로 이 나라 형편치고는 도로 상태가 놀랍도록 양호하다. 걷기가 지루해졌다. 약 한 시간 반을 걸으니 신성한 숲 그늘에 비석 하나가 보였다. (?) 거기서부터는 다부지고 기괴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길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풍광은 소박하지만 변화무쌍해서 구경하는데 물리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수원까지 이 가냘픈 소나무들이 우리와 동행하면서 옛 임금들의 자연 사랑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들은 궁궐 주변과 이 긴 도로에서 짙은 초록의 그늘을 즐기려 했지만, 그 밖의 다른 데서는 거의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다. 7시 무렵 수원에 도착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211~212쪽)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남공심돈’,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임금이 사도세자로 더 알려진 아버지 장헌세자의 무덤을 양주(현 서울시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 팔달산 아래에 축조했다. 정조는 이 화성을 근거로 당파를 척결하고 강력한 왕도 정치를 실현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또 한양 남쪽을 방어하는 요새로 화성을 지었다.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은 거중기와 활차·녹로 등 신기재를 활용해 1794년 1월 착공, 2년 만인 1796년 9월 완공했다. 성곽 총 길이 5744m, 성벽 높이 평균 5m, 면적 130ha로 문루·수문·공심돈·장대·노대·포루·각루·암문·봉돈·적대·치성·은구 등 총 49개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화성 버들잎 모양으로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긴 형태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일부 훼손됐으나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대로 1970년대 후반 대부분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했다. ‘팔달문 성곽 잇기 사업’을 하고 있는 수원시는 2029년까지 철거된 성곽과 적대 2개소, 남암문, 남공심돈을 복원할 계획이다. 국가 유산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가파르고 치솟은 구릉맥이 집들을 골짜기 뒤로 밀어 넣었다. 허물어진 방벽과 낡은 보루가 지난날의 빛바랜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성곽이 그 위로 뻗쳐 있었다. 이는 150년 전 이 도시가 신설 정예부대가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물론 지금은 어린 소나무들에 무성한 싹이 돋아 군데군데 부서져 떨어진 돌덩이들을 조롱하고, 이 성벽이 포탄 한 발 막아 내지 못할 만큼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던 어느 작가를 여기저기서 비웃고 있다. 성곽이 축조되었을 당시의 견고함은 의심할 여지 없이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이 방어 시설은 강력한 항전 의지의 영예로운 증거로 길이 남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219쪽)

수원 화성에 대한 베버 총아빠스의 첫인상이다. 그는 허물어지고 방치된 화성에서 스러진 조선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처럼 조선과 조선인을 조롱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하우현 교우촌에서 강인한 한국인의 혼을 목격했다. ‘의’를 위해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리지만, 그 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끈질기게 살아가는 무서운 생명력을 체험했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봉돈’, 랜턴 슬라이드,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화성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공심돈’

진리에 순응하는 한국인의 정신에서 그는 이 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에 빠졌다. 그래서 이전의 이방인들이 촬영한 사진들과 달리 허물어진 성채를 담은 그의 사진에는 힘이 있다. ‘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사진 1>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허물어진 성벽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초병 하나 없는 옹성이지만 누구 하나 쉽게 근접할 수 없는 내재적 위용을 드러낸다.

공심돈(空心墩)은 ‘속 빈 돈대’라는 뜻으로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망루처럼 세워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공심돈은 우리나라 성 중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동북공심돈·남공심돈 세 곳이 있었는데, 베버 총아빠스의 화성 사진에는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만 남아있다. 현재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원 화성 밖에서 촬영한 남공심돈 전경이다.<사진 2> 성벽에 덩굴식물이 무성하고, 초가 사이로 얼기설기 엮은 나뭇가지 담장에 빨래가 널려 있다. 남공심돈은 남암문(南暗門) 옆 성곽이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설치돼 팔달문(八達門)과 남수문(南水門) 일대를 방어했다. 남공심돈은 1930년 폭우로 없어졌다. 어쩌면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이 현존하는 유일한 남공심돈 사진일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봉돈’(烽墩), 곧 봉수대를 가장 흥미로워했다.<사진 3> “성벽 안쪽은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포문과 요철형 총안을 갖춘 어른 키 높이의 성첩으로 마무리했고, 바깥쪽은 화강암 마름돌을 쌓아 5m가 넘는 깊이로 떨어지게 했다. 길이 15m·너비 6m의 네모 반듯한 봉돈 마당은 성벽 안팎을 반반씩 차지한다. 안으로 통하는 입구는 문을 달아 잠글 수 있게 했다. 폐허가 된 마당에서 무너진 돌계단을 오르면 넓은 외벽 위에 높이 3m의 원추형 봉수대 다섯 개가 우뚝 솟아 있다. 봉화를 지피는 화구는 안에서 편하게 관리하게끔 설치함으로써, 밖에서 보이지도 않고, 성첩에 가리지도 않고, 적들이 저지하지도 못하게 했다. 반란이나 적의 침공 같은 주요 정보와 지시 사항 등을 봉돈의 세찬 불꽃 신호가 그때그때 조합을 달리하여 인접 봉수대로 전달한 것이다. 신호가 집결되는 최종 봉수대는 서울 남산에 있다. 지방과 중앙 간의 상호 교류가 봉화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낮에는 젖은 짚을 태운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19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