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풀리지 않는 문제 같은 것’이라는 노랫말 가사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삶에서 닥치는 문제들을 경험하며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수수께끼와 같은 삶을 꿰뚫어 보려면 보는 눈과 듣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죽을 수도 있다.
신앙은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를 꿰뚫는 눈과 지혜를 주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신앙의 눈이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긴 시간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인물에게도 해당한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 천사의 방문에서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에 이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통 수수께끼와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 놀라운 일들을 겪으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루카 1,29; 2,19.51 참조)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마리아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사화 중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는 장면은 여느 기적과는 다르게 다가온다.(마르 8,22-26 참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발라 고쳐주시는데, 그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삶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신앙의 눈,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서서히 진행된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분명히 보이다가도 시련과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이 모호해진다. 그렇게 어두운 밤을 거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신앙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출발점에 다다른다. 얼마 전 친구 신부가 사제품 은경축을 맞아 소회를 밝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모호해지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좀 더 옆을 살펴야 하고 침묵해야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겨 곰곰이 생각해 볼 대목이었다.
생각해보면 교회 안의 모든 활동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말씀과 성사, 기도와 애덕 실천, 봉사와 선교?. 그중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에 머물러보고자 한다. 신학생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성소를 식별하고(알아차리고) 부르심에 응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이 과정에서 공동체 삶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사들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학교인데 막상 살다 보니 그렇지 않아 실망하지만, 서로를 알아가고 자기를 알아가며 신학교에 ‘천사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나와 생각이나 성격이 맞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임을, 그 또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임을 깨닫는다.
타인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외롭고 재미없을까. 지지고 볶고 다투고 싸우지만,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타인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신앙의 눈을 계속해서 떠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