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비로소

(가톨릭평화신문)

비로소 (부사)

1.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건이나 사태가 이루어지거나 변화하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말.

저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고 있었음을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지나고 나서야 그렇구나 깨닫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늘 저와 함께하심을 믿으니까요.

학창시절 저는 학교폭력을 심하게 당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송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저는 이사한 후 무리가 모여 한 친구를 괴롭히는 걸 참지 못하고 그러면 안 된다며 맞섰습니다. 심지어 치고받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담임 선생님은 저만 혼냈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열심히 해명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저만 체벌받고 반성문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무기력해졌고, 이른바 일진 무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학교폭력의 강도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다고 맞았고, 무언가를 하면 나댄다며 맞았습니다. 일진들은 심지어 아무 이유 없이 복도를 걷다가 퍽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어른들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은 그저 친한 친구들 사이의 장난으로 치부하며 저의 상황을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몇몇 선생님은 ‘네 성격이 이상해서 그렇다.’ ‘네가 문제 없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다’라며 되레 저를 문제아로 몰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도 제게 선생님들과 같은 말씀을 했었습니다. 어른들의 이런 말에 저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습니다. 저는 세상 어디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빛 한 점 없이 어둠만 가득한 곳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저 막막할 뿐이었습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조차 안 보이는 현실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누차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목의 상처를 어머니께 들켰을 때는 간지러워서 박박 긁다가 잘못해 할퀸 자국이라고 거짓말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저는 더더욱 낙담했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뜻대로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하느님께 제발 저를 죽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음의 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도와달라는 기도도, 차라리 저를 거두어달라는 기도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이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직접적 학교폭력은 없었지만, 왕따가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좋았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오히려 혼자라서 편했고, 혼자이고 싶었습니다.

나름 좋았던 성적은 고등학생 때 곤두박질쳤습니다. 공부보다는 글, 특히 소설에 심취했습니다. 틈이 나면 공책에 글을 끄적거렸습니다. 무수한 망상을 표현하는게 너무 재밌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공책에 글을 적을 때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소설의 세계는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할머니께서 주말마다 같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자고 계속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게 할머니는 부모님보다 가깝고 편한 존재였습니다. 시시콜콜한 얘기, 시답잖은 얘기도 귀 기울여 들어주셨고, 항상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저에게 늘 ‘안테로가 제일 잘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할머니의 응원은 저와 세상을 이어주는 한줄기의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성당 가자는 말씀은 정말 귀찮았습니다. 저에게 미사는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노래들로 가득한 성전에서의 미사는 당시의 저에게 진짜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노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미사 시간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이 분심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죠. 그래서인지 미사드리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재미없는 미사를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혹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혹은 고통에 찬 표정으로 제대를 보며 진심을 다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강론 시간에는 폰을 장궤틀 밑에 몰래 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일요일 아침 8시면 전화를 하셨습니다. 때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빠지기도 하고, 간다고 대답해놓고 다른 데를 가기도 했으며, 영성체 때 도착해서 처음부터 미사드린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꾸중 없이 늘 따뜻한 어조로 성당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실까, 제발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성당이 뭐가 좋다고....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이런 얘기를 드리면 꼭 대화의 끝은 ‘그런 안 좋은 마음들을, 혹은 좋은 마음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러 가자’였습니다. 그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저에겐 혼자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군 입대 이후, 할머니께서는 훈련소 때는 물론 광명시에 있는 부대의 성당에까지 많은 간식비를 계속 보내주셨고, 항상 성경 말씀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성당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정성이 감사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아까울 만큼 저는 성당을 가기가 싫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군대에서 종교생활을 한 유일한 이유가 부대 안에서는 먹지 못했던 간식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군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혼자 잘하면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호의나 도움도 싫었습니다. 언젠간 저 사람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군대에서 겪은 일들, 겪은 사람들 또한 저를 괴롭혔기 때문에 혼자만의 삶이 좋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군 생활 중에 일어났습니다. 전역을 두어 달 앞 둔 시점에 저는 박격포 실사격 훈련을 나갔습니다. 인수인계 차원에서 후임과 역할을 바꿔, 제가 부사수로 훈련에 임했습니다. 설치한 포를 해체할 때였습니다. 통제간부의 마지막 철수명령이 떨어진 후 박격포를 해체할 때 당연히 발사된 줄 알았던 포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제 발 바로 앞에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연습용 고무탄이 아닌, 실제 포탄이었던 지라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몸도 얼어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 동료들이 저를 끌어내다시피 해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포탄은 불발탄이라서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진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는 소리를 끝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위로나 어떤 말로도 저는 평온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살았지?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은 거지? 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한 달 내내 이런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후회와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지? 왜 나는 이렇지? 바뀌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22년을 혼자 살아온 저에게 답을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날은 의무적으로 안부 차 연락한 게 아니라, 그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께 제가 겪은 일을 말씀드리고 한 달 동안 쌓였던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31살이 된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그날의 일을 모르십니다.

할머니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산 게 후회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도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할머니’라는 저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할머니께서는 딱 한마디 말씀하셨습니다.

“안테로야, 하느님께서 지켜주셨구나. 몸 건강히 돌아오너라.”

이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주셨다는 말. 지금까지 제 물음과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고, 내가 너무나도 못나서 버린 분이신데.....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하던 저였는데..... 할머니의 이 말씀 한마디에 흔들리고 혼란스럽던 저의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몇 주 후 제대를 했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가 인사드리자 할머니께서는 저를 꼭 안고 이번 주일에 같이 미사드리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홀린 듯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성당을 가면서 할머니께서는 꼭 잡은 제 손을 미사가 끝날 때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미사 후 수녀님께 본당에서 새로 활동할 청년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본당 청년회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막상 들어가보니 청년회 활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이 두려웠으며, 어쩔 줄 몰라 혼자서 하는 버릇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도 나를 해코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여전히 맴돌았습니다.

청년회 활동 중 전례 봉사도 하게 되고, 사람과 부딪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시 본당 청년회장과 부회장으로부터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에 본당 청소하는데 같이 하지 않을래? 청년회 멤버십 트레이닝에 같이 가지 않을래? 성지순례 겸 피정 가는데 같이 하지 않을래? 별도 일정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주일미사 때도 ‘당연히 올 거지?’ 라며 계속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든 생각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였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본당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휴대폰을 반납하고 지내는 그 생활에 매력을 느꼈고, 그 후로 청년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피정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나눔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나의 약점이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과거 이야기를 하면 내가 그때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런 아픔을 겪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선택 주말, 청년성서모임 등을 하던 어느 날 본당에서 사순 피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피정에서 저는 ‘기도’에 대해, ‘하느님과의 대화, 관계’에 대해 조금 맛을 봤습니다. ‘기도란, 대화란 청원하는 것이,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하느님께 이거 해달라, 이렇게 해달라, 왜 안 해주느냐고 어리광만 부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청년회 지도신부님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하느님께 무언가 이루어달라고 조르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제가 겪었던 일을 말하기도 하고, 성경을 읽으며 그 순간 끌리는 구절을 계속 읊조렸습니다. 이게 완전한 기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하느님과의 첫 대화였습니다.

그렇게 저의 기도는 바뀌었습니다. ‘눈앞에 원하는 것을 이뤄달라’가 아니라 ‘바뀌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삶 대신 다 같이 함께 어울리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저를 왜 광야에 버려두었습니까, 왜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원망하는 대화가 아닌,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제가 진심으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대화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묵주와 성경만 가질 수 있었던 사순 피정에서의 이 말씀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요한복음 16장 33절

이후 나의 ‘아픔’에 집중하지 않고, 아픔을 ‘나눔’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사실을, 또 아픔을 나누면 진심을 다해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글 쓰는 것으로 인해 아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글쓰기는 저에게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습니다. 부산교구가 청소년·청년 문예 공모전을 실시한다는 것을 주보에서 보고, 도전을 해보았습니다. 총 7편의 시를 쓰면서 고민하고, 쓴 시를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글을 쓰면 다시 예전처럼 현실을 피하는 게 버릇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무색하게 너무나 재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를 쓰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순간이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글 쓰는 즐거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연스럽게 나간 성당, 당연스럽게 활동한 청년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다 생각한 것은 어느 것 하나 당연하게 이루어진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가 용기를 내 성당을 나간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저를 끊임없이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외면했고, 버림받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렇지 않다고 끝없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있었고,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나라는 울타리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곁에 있음에도, 그 모든 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몇 번 넘어지는지 세지 않습니다. 몇 걸음을 걸었는지 헤아립니다’라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 역시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제 삶은 다이내믹하게는 아니더라도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불안함과 무서움으로 점철된 제 삶이 조금씩 안정되고 경외감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읍 - 최태영 안테로

뜨거운 뙤약볕에 그늘을 만들고자

성읍을 쌓아올려 맘 편히 쉬고 싶어

하늘을 가리고자 높이높이 쌓다 보니

울창한 정글 숲에 맹수를 막고자

성읍을 쌓아올려 맘 편히 쉬고 싶어

누구도 못 부수게 튼튼하게 쌓다 보니

무수한 사람들의 비난을 듣기 싫어

성읍을 쌓아올려 맘 편히 걸어 잠가

함부로 넘지 못하게 가시 돋게 쌓다 보니

당신께서 오시어 쌓아올린 그 성읍

당신의 손길로 손수 무너뜨리어

멈춰선 저를 당신 말씀으로 이끄시네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음에도 저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고 있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늘 저와 함께하심을 비로소 깨달았으니까요.


최태영 (안테로, 부산교구 당감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