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느님께로 가 꽃이 되었다.
아름드리 큰 나무에 걸터앉아 나뭇잎 사이의 햇살을 맞는다.
나무는 하느님이셨고 나의 숨이시며 나의 쉼이셨다.
목 놓아 흘린 눈물은 새들의 지저귐에 반짝인다.
나무는 벗이다.
꽃, 사람, 동물, 새, 여러 모양으로 말을 건넨 구름도 벗이다.
손끝을 스치며 감각을 깨우는 바람도 벗이다.
눈을 감으니 곳곳에 당신의 숨결이 닿는다.
숨결에 눈을 맞춘다. 침묵 끝에 평온함이 함께 한다.
말씀이 생명이다. 생명이 내 숨결과 호흡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돌아보니 곳곳에 계셨다.
내 눈길 내 숨결 내 손끝에!
곳곳에 계셨다
마리아의 잉태 순간은 받아들임의 영성이다.
아이의 장애진단 선고는 예수님의 사형선고가 아닌 마리아의 받아들임의 영성이었다. 어떻게 지나왔을까? 갈팡질팡했던 시간 속에서 시련은 고통 그 자체였다. 고통이 은총이며 부활임을 알고 나서야 삶은 바뀌었다. 삶은 받아들임이다. 결혼도 출산도 시련도 매 순간의 일상도.
마리아께서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다. 두려워하셨고 곰곰이 생각하셨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을 하느님의 뜻으로 들으시고 나서야 받아들이신다. 받아들이는 과정은 모두가 다르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받아들이는 과정이 길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나를, 시간을, 삶을 받아들임이다.
하느님 당신은 내 영혼의 닻입니다. 당신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심을 압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는 거북이는 기다려주는 희망이 있기에 완주한다. 아이를 통해 볼 수 있게 하셨다. 기다림, 느림, 울림이 그래서 기도가 되었다. 당신 침묵은 언어이시며 자비이심을 알게 하셨다. 숨 가쁘게 달려왔다. 당신 품에 안으시어 숨을 쉬게 하셨고, 당신을 내주시어 쉬게 하셨다. 아는 게 하나 없으니 손에 쥐어주시고 이건 너와 나의 사랑이란다, 이건 너와 나의 사랑의 증표인 인내란다. 지금까지 그러하셨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해주셨다.
존재성도 정체성도 없었던, 왜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나를 부정하고, 하느님을 부정했던 삶이었다. 내 일상은 가시밭의 백합화의 삶이 되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어 맡김의 일상을 사는 것이다. 근심, 걱정, 불안, 미래는 내 생각이니 생각은 쉬기는 하되 멈추게는 하지 말자.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가게 두자. 내어 맡김으로!
절망
펑범한 어느 날, 그 일상이 사라졌다.
아침에 뜨는 해는 뜨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어둠이다. 달빛도 별빛도 사라진 내 일상, 우리 가족의 일상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소중함을 찾아야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발밑의 늪은 어쩌란 말인가? 준비되지 않은 내 일상이 산산조각 깨진 접시처럼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아이의 이름을 짓기도 전에 기도하기 위해 교우 분들과 성체조배실에서 불리던 그 이름 은총이는 우리 가족에겐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은총이는 기쁜 소식이 되어 우리 집 셋째로, 막내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왔다.
태어나기 전 양수 과다로 검사도 하고 일정량이 넘으면 바늘을 꽂아 양수를 빼야 했다. 다행히 바늘 꽂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배가 너무 커서 한 달을 남겨 두고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형, 누나랑 똑같은 3.1㎏, 건강하게 태어났다. 새해 문을 열고 눈처럼 예쁜 아이가 선물로 왔다.
가슴을 에이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6개월. 뇌수막염으로 입원한 아이는 밤새 아프고 힘들어했다. 조금 나아지나 하고 맘을 놓을 때쯤 구토를 하고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이 손을 쓰는 중에도 아이는 여러 번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숨이 넘어갔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급박하게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엄마는 들어갈 수 없다. 눈앞에서 닫히는 문이 거대하다. 내가 엄만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닫힌 문이 말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말을 잃어버렸나? 왜 말이 나오지 않지?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뭐라고 했을까? 면회 시간마다 아이의 귀에 같은 말만 했다. 영혼은 듣고 있기에 들려주었다. 엄마, 아빠는 준희 사랑해! 누나도 준희 사랑해! 예수님도 준희 사랑해! 성모님도 준희 사랑해! 형아도 사랑해! 아이는 3일 만에 깨어났다. 기쁨도 잠시였다. 여러 번 경기를 일으킨 아이에게 간질이라는 병명이 내려졌다. 받아들이기가 너무 버거웠다. 간질이라니,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내가 착하지 않아서인가? 자책감만 들었다. 주님께 매달렸다. 말씀하시지 않는 주님을 바라봤다.
전문의가 있는 병원으로 다시 진료를 신청했다. 먼저 병원에서 치료한 일과 100일 동안 지켜보면서 경기하는 약을 안 먹였는데 경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는 간질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6개월에 겪은 마지막 시련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도 잔병치레를 큰 병이나 앓는 것처럼 치렀다. 36개월이 되었을 때 시련은 시작되었다.
모든 발달이 느렸다. 언어는 더 느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으니 입원해서 검사하자고 했다. 느낌이 불안했다. 검사하는 동안 형과 누나는 미사 참례를 하며 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느낌으로 누나와 형도 아는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3일간 검사한 결과는,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왜 나만 불행하냐고? 왜, 나만 미워하냐고, 원망을 했다. 아주 먼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전반적 발달장애 2급. 자폐성 장애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다. 그냥 한 달을 울고 다녔다. 울분과 설움을 모두 표출해서였을까? 현실이 보였다. 울음을 토해내면서 아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뇌수막염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닫혔던 문 앞에서 절망은 잊었다. 두 번째 절망은 진짜 절망이었다.
시선(신뢰, 존중)
엘리베이터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모두의 신경이 하나로 모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니 아이가 부끄럽고 이 순간이 부끄러웠다. 왜 부끄러웠니? 나에게 묻는다. 일반 아이였으면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달랬을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이기에 내 신경은 타인의 시선에 갇혀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봤다.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주님 앞에서 마음을 추슬렀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향해 한 말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아이가 듣는 것 같았다. 소리 내는 횟수가 줄었고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마음이 나비처럼 가볍다. 이유도 모른 채 늘 무거웠다. 타인을 향했던 시선은 오로지 아이에게만 향했다. 내 시선은 늘 아이만 보고 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예뻐 죽겠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죽겠다.
늘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말을 먼저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걸 느꼈다. 갈팡질팡 혼란스러울 때마다 주님께 기도할 줄 몰랐던 나는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라고 기도드렸을 뿐인데, 지혜를 주셨고 함께하고 계심을 이렇게 알게 하셨다.
어느 날 고학년이 된 아이에게 준희야, 엄마는 행복해! 준희는? 하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는 걸까? 하는 순간 말했다. 준희도 행복해요. 아! 눈물 나도록 행복이 더해졌다.
내 시선은 아이를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어디 있을까? 하느님을 향해 있음을 믿는다. 성당 가는 건 아이에게 의무다. 일상을 본능처럼 살듯이 아이에게 신앙생활 또한 본능인 것 같다. 자폐는 타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본인이 원할 때 행동한다.
청소년 성가, 어린이 성가, 가톨릭 성가, 성령기도회 성가 책 가사를 컴퓨터로 필사했다. 몇 년 동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빠르고 경쾌하고 힘있게 들렸다. 수도회에서 생활하시는 작은 수사님 같다.
하느님을 위한 시선은 지혜와 함께하셨다. 그 지혜는 아이와 함께 계셨다. 나와 아이의 시선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축복이다. 신뢰와 존중이 되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신뢰와 존중은 아이가 성장하는 빠른 원동력이 되었고 마중물이 되었다. 한그루의 귀한 나무가 되었다.
기다림의 미학(느림, 울림)
아이 옆에서 이름을 불렀다. 준희야, 준희야! 엄마를 보고 고개를 돌린 시간은 0.1초? 0.2초? 두 번, 세 번을 반복해도 아이의 행동은 똑같다. 막막함에, 서러움에 흘린 눈물은 원망의 눈물이다.
차라리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라고 하세요.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와 무엇을 할 수 있어요 하며 목놓아 울었다. 그렇게 오열하는 엄마를 아이는 철저히 외면한다. 그 등에서 암담함을 느꼈을 때 지혜가 스쳤다. 아! 왜? 나는 아이에게 주려고만 했을까? 아이가 원하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까? 전자는 지혜였다. 후자는 내 생각이었다. 깨달음이 스친 자리는 분명했다. 며칠을 아이가 하는 행동을 바라봤다. 패턴이 보였다. 자기만의 규칙대로 행동했다. 뱅글뱅글 도는 등 자폐아이가 하는 행동을 잠깐 지켜보다가 관심을 바꾸는 행동으로 제지했다.
뇌수막염으로 중환자실에서 숨이 넘어가 호흡기를 달고 있는 아이의 귀에 면회 때마다 들려주었던, 상황을 재연하는 삶이 일상이었다. 영혼에게 들려주듯 이해를 시켰다.
처음 신발을 신기는 과정에서 내 입은 쉬지 않고 반복하며 아이가 스스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엄마가 잡고 있는 발에 신발을 걸쳐놓을 때까지 몇 주가 걸렸다. 휴지를 각 티슈 앞에서 뽑는 것부터 엄마 손에 놓아주는 것도 몇 주가 걸렸다. 음식 앞에서 맛있니? 네! 하기까지도 몇 달이 걸렸다. 2~3단어로 말하는 것도 몇 년에 걸쳐 했다. 비로소 중1 때부터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성격이 급했던 내게 기다리는 건 힘겹다. 나는아이를 키우며 성화되어 갔다.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 기다려야 한다는 것. 모두가 그날 목놓아 울던 날, 설움에 울고 울분에 울던 내 기도를 들으셨다. 지혜를 주셨던 날 내 세상은 시작되었다. 지혜가 함께하시는 날이었다. 아이를 지켜보며 아이의 마음을 보았던 날, 그 마음은 아이가 보내는 또 다른 언어였다. 감각의 언어다.
동화책을 정리하다 보면 아이가 늘 펴놓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었다. 아!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아이와 소통한 느낌이었다. 마음 한 자락 보았을 뿐인데 마음이 가득 찼다. 아이는 자신을 거북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였다. 토끼는 잠을 자고 거북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장면, 아이는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힘겹지만 그 끝은 완주였다. 기다림, 느림, 아이는 계속해서 울림으로 성장하고 있다.
치료 과정에서 아이와 실랑이가 벌어지면 앞이 캄캄했다. 그럴 때면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라고 화살기도를 참 많이 바쳤다. 버스 타기 전 쉬를 해야 하는데 그냥 탈 때가 있다. 버스에서 아이가 땀을 뻘뻘 흘린다. 쉬가 마려운데 참느라 애쓰는 것이다.
어쩌지, 나도 애가 탔다. 버스에서 내려 바지를 벗기니 시원하게 눈다. 그 후에 몇 번이나 설명하고 기저귀를 채웠다. 그런데 땀을 흘리면서도 쉬를 안 한다. 버스에서 내려 기저귀를 푸니 그때서야 쉬를 한다. 오랫동안 간직한 한마디, ‘아! 준희는 장애가 아닐 수도 있다.’ 가슴깊이 새겨졌다. 거북이는 기다림이었다 느림이었다.
감각을 깨우다(매일 나가기, 일기)
힘겹게 유치원에 입학했다. 통합유치원이 거의 없는 시대였다. 성당 유치원에서 받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랜 대화 끝에 수녀님께서 성가정이네요? 하시며 신부님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첫날 아이를 보내놓고 걱정을 한가득 안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렸고 갈팡질팡했으며 노심초사했다. 원복 입은 모습은 멋있었다.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혜가 함께하심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었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표정을 읽는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표정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백화점으로 간다.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손을 잡고 다닌다. 2~3시간을 돌아다니고 간식을 먹는다. 하루는 백화점, 하루는 쇼핑몰, 마트, 시장, 공원, 동네를 누빈다. 유치원을 다녀와서, 학교를 다녀와서 주말에도 방학에도 매일 나갔다. 기분도 전환할 겸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아빠도 누나도 형도 함께했다. 매일 나가는 행동은 감각을 깨우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1 때 언어치료를 했다. 아이가 그 전에는 원하지 않아서였다. 이해를 시키니 수긍했다. 선생님께 일기 쓰는 걸 지도해달라 부탁드렸고 아이에게도 설명했다. 2년 동안 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일기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중학교 때 일이다. 손톱 깎는 걸 가르쳐야 했는데 엄마가 해야 할 때가 있고 선생님께서 해야 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효과 만점이었다. 선생님께서 어머니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스스로 손톱을 깎게 되었다고 좋아하셨다.
이번엔 늘 고민이었던 용변 후 뒤처리를 부탁드렸다. 주먹을 살짝 쥐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물감을 묻혀 교육시키면 어떨까요? 이것도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
감각을 깨우려면 끊임없이 두드려야 했다. 해주기보다는 이해시키고 반복하면서 기다려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아이는 첫영성체 때 기도문을 제일 먼저 외우고 제일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미사 참례해서인지 기도문 외우는 건 다른 아이들보다는 수월하게 지나갔다. 긴 미사도 칭얼대지 않고 참례를 했다. 울며 기도하며 아이와 함께 성장했다. 성체를 모시고 묵상하면 아이는 엄마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눈물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손등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에서 주님이심을 느꼈다. 작은 손이 주는 큰 위안이었다. 재울 때면 불러주던 노래가 있었다. 반짝반짝 준희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준희별 아름답게 비치네. 작은 별 노래를 준희별로 바꾸어 불러주었다. 반짝반짝 빛나기를 소망하는 엄마의 기도였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가 이 노래를 불렀다. 깜짝 놀라 엄마가 불러준 거 기억나니? 하니, 네~ 라고 대답했다.
처음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였다. 기억 저편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사촌 큰어머니 댁에서 인사하고 가려던 때였다. 사촌 오빠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니, 큰어머니가 그래서 혼자 가겠다고? 하셨고 이에 오빠는 또 웅웅 소리를 냈다. 큰어머니가 뭐라 뭐라 하시는 장면이 기억 속에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어린 마음에 이상한 장면이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큰엄마는 대화를 하셨다. 이 일은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았다. 어느 날 아이가 놀다가 와서는 마음이 담긴 언어로 엄마? 엄마? 하는 소리에 너무 놀랐다. 벙어리는 아니구나, 말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때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만이 알아들었던 거였다. 큰어머니가 말을 못하는 오빠와 대화가 가능했던 이유였다.
감각의 언어
엄마와 아기가 나누던 감각의 언어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자폐 아이와의 소통은 그렇게 힘겨운 시간이 되었다. 늘 바라보고 있어야 하고 모든 신경이 아이를 항해 있어야 했다. 대답하지 않는 아이에게 몇 번을 묻고 대신 대답하며 설명했다.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감각으로 느낌으로 긍정 또는 부정의 대답을 한다.
표정으로, 그렇게 미소로 무엇을 하든 아이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러면 감각으로 대답하던 아이가 단어로 말한다. 아멘! 알렐루야! 형, 누나가 엄마라고 했을 때도 기쁨이었지만 아픈 아이가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는 가슴을, 영혼을 울린다. 아이가 부르는 소리는 울림이다.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전 파란불이 켜졌을 때도 기다리는 마음을 심었다.
장애 아이들은 모든 감각이 다 열려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반응한다. 우리 아이도 감각으로 듣는다. 눈으로 듣고, 귀로 듣는다. 듣는 영역이 넓다. 이걸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모든 감각으로 들으니 눈 맞춤이 더 안 되는 것이다. 스스로는 다 듣고 이해했으니 급한 일이 없다. 상대가 왜 저러는지 표현은 못 하지만 알고 있다.
표현하고 싶지 않다. 행동하고 싶지 않다. 왜 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이유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감각으로 깨우고 두드리고 엄마와 눈 맞춤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많이 걸어 다녔다. 걷다가 카페도 가고 장도 보고 아이쇼핑도 했다.
대학교 때는 3년 동안 서울 도보성지 순례와 성지순례, 피정을 다녔다. 개인 피정을 갔을 때 신부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을 했다. 성경을 너무 잘 찾는다. 신약 구약 순서를 알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이 놀랍다. 엄마가 묵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도 했으리라 믿는다.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의 방식으로 말이다. 함께하는 피정도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으리라.
3년 동안 지하철을 이용해 성지 순례를 다닌 결과 환승하는 법과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놀랍다. 주님이 하시는 일! 야훼이레! 말씀이 생명이다.
지난해 가을 어느 시월 삼성 희망별숲에 취업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고용보험훈련센터를 다닌 후다. 처음엔 어디에 취업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에서 생활하는 건 예측할 수 있지만 직업을 찾기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훈련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 선생님들은 아시겠지 하면서 주님만 믿자 하는 마음이었다.
나에서 우리(함께 성장)
처음 진단을 받고 목놓아 울 때 아이의 모습은 ‘바위’ 같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생물 같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분리된 느낌이다. 그래서 더한 절망을 느꼈다. 그 절망감에 바위 같은 아이를 보며 어떤 원망의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원망을 기도로 들으셨다. 선으로 갚아주셨다. 하느님 앞에 엎드렸다. 키워본 적은 없어도 눈으로 본 적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나 특수학교 봉사도 다녔다.
그곳에서 본 아이가 내게 왔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혜가 스쳐 지나간 자리는 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사라졌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화살기도를 남발했다.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했다.
성령의 이끌림으로 치료는 10개월만 다녔다. 준희는 반드시 되돌아오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선생님께, 그래도 유치원 보내볼게요 라고 말했다. 결국 준희는 돌아가지 않았다. 유치원 3년,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3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다.
다른 엄마들 시선도 똑같았다. 내 마음은 불안하지 않았다. 적응 못 하면 다시 오면 되니까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유치원 문을 두드렸을 때 한 번에 얘기가 되지는 않았지만 끈질기게 매달렸고 성가정이라는 소리를 듣고 통과했으니 이 또한 야훼이레다.
아이는 자신을 나무로 표현했다. 나무를 그리고 이끼로 푸른 잎을 만들었다. 아름드리 큰 나무는 아니지만 작고 앙상한 나무도 아니다. 그 나무는 보기 좋게 컸다. 푸르게 푸르게, 아이의 마음이다. 그 옆에는 ‘행복한 나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이 거름이 되어 나무는 성장하고 있다.
이 나무의 나이테는 올해 23년이다. 자폐라는 이름의 절망의 시간은 우리라는 희망의 시간으로 성장했다. 나였던 아이는 우리라는 말로 마음 밭을 일궈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아이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해 있으니 하느님 사랑을 받은 아이는 하느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는다. 나에서 우리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 마중물이었다. 반복, 기다림, 느림, 울림이 기도가 되었다. 기도는 열매를 맺는다.
일상(교육)
우리는 주어지는 하루를 본능으로 그냥 살아간다. 우리 아이는 일상이 교육이다. 문을 열고 나갈 때 뒷사람이 다치지 않게 확인 후 문고리를 놔야 한다는 것도 지금까지 반복하는 교육이다. 악수도 어른이 손을 내밀면 준희는 두 손으로 하는 거라고 몇 년을 교육시킨 후에 이루어졌다. 자신과 관련된 건 빠르게 익히는 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들은 오래 걸린다.
일기쓰기는 언어 치료하는 2년 동안 수업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다. 수영은 고등학교 3학년에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잘한다. 현재는 배영 발차기를 배우고 있다. 서울 지하철 이용은 3년 동안 도보 성지순례와 희망의 순례를 통해 이루었다.
취업을 위해 다녔던 훈련센터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야 훈련센터에 도착하는데 옆으로 집에 가는 버스가 보이니 탔다가 잘못 탔음을 알았다. 노선을 확인한 후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다시 전철을 타고 훈련센터로 가는 역에서 내렸다. 1시간 30분 지각이었지만 아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대로 전철역만 가면 찾아갈 수 있음을 3년 동안의 지하철 이용 교육을 통해 인지한 것이다. 교육은 일상이다.
마트에서는 과자를 직접 한 개만 선택하는 교육을 통해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을 배우게 했다. 지금도 선택한 걸 계산하기 바로 전에 바꾼다. 초등학교 1학년, 더 많이 긴장한 시간이자 한 해였다. 장애아를 키우는 건 나의 고통이며 가족의 아픔이다.
타인은 타인이다. 이해, 위로, 공감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따뜻한 선생님을 만나면 그 해는 마음에 위로가 된다. 아이를 밀어내는 교사에게 무얼 바랄 수 있을까? 갈팡질팡 간절히 기도하며 한 해를 버텨냈다. 오직 아이만 봤다. 힘들고 아픈 건 엄마가 할게. 준희는 거북이가 열심히 달린 것처럼 걸어가! 그렇게 주님께 울며 기도했다. 아침이면 등교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상한 소리 내면 돼, 안돼? 아이는 안돼요! 대답한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조용히 가야 해. 그리고 도와주세요, 도와줘라고 말해야 해! 아이는 네라고 대답한다. 성장한 후에는 예의지? 라는 말로 바꿨다.
아침마다 반복하는 교육이었다. 하교 후 아침에 얘기했던 거 실천했느냐고 물으면 모두 네라고 답한다. 반은 맞는 대답이다. 약속은 지키는 아이다. 직진이 규칙이고 법인 아이다. 교육의 효과는 몇 주가 지나면 나타난다. 지시사항은 바꿔서 다시 설명한다. 진단받고 처음 교육한 말이 있다. 괜찮아, 괜찮아다. 교육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에 아이가 실수를 했다. 엄마보다 빠르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고2 때 만든 작품 속에 써놓았다.
우리 아이는 자폐성 전반적 발달장애 2급이다. 그래서 가장 힘든 건 눈 맞춤이다. 지금도 10초 이상 눈 맞춤이 안 된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도 오래 걸린다. 일반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니도록 하려면 끊임없는 반복 교육이 필요했다.
대학교는 집에서 버스와 전철로 1시간 30분 거리였다. 코로나 기간에 대학교 1학년을 다녔다. 취업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대학생활은 지금이어야 했다. 대학생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 자신만이 자신에게 줄 수 있고 습득할 수 있기에 꼭 필요했다.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 가는 버스에 올라 출발하는 걸 보고 돌아왔다. 오후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리면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은 역 근처 성당에서 미사 참례, 성체조배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수업에는 같이 등교해서 수업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1학년을 마치고 12월 31일 산책하는 중에 아이가 말했다. 내년 2학년에는 혼자 학교 다닐게요. 아름다운 울림, 기적이 있는 날이었다.
일상이 구름이 흘러가듯 평범한 날이었다. 삼성 희망별숲에 면접을 본다고 한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감사함에 눈물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어느 날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삼성은 돈이 많아서 표준 사업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이셨던 어느 강사님 얘기였다. 2주년 야유회를 다녀오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뒤늦은 감동은 야훼이레. 하느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감사 기도를 했다.
하루 4시간씩 한 달 근무를 했다. 첫 월급을 탔다. 대학생활도, 직장생활도 희망이고 꿈이었다. 신기루 같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느님은 곳곳에 계신다.
아이에게 십일조가 무어냐고 물었다. 정확하게 자신이 받은 월급을 말한다. 십일조를 낸다고 했다. 지금까지 3번 냈다. 자신이 직접 인출해 사무실에서 통장으로 낸다. 이것도 훈련이며 교육이다. 오랜 시간 인내의 결과로 희망은 일상이 되었다. 내어맡김의 일상을 사는 것.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움이 북받치다 감사함에 눈물이 흐른다. 지나간 시간 속 응어리와 엉켜있던 매듭이 풀리는 감사였다. 치유는 그렇게 당신의 숨결로 곳곳에서 스며들었다.
김정화 체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