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봉인이 열린다.(9절) 제단이 등장하고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울부짖는다. 그 영혼들은 자신의 피 흘림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있다. 흔히 레위기 4장 7절을 떠올리며 이 대목을 해석한다. 레위기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를 제단 밑바닥에 쏟는 유다의 속죄 예식을 소개한다. 동물의 피는 유다의 죄와 비례하여 희생되어야 했다. 나는 희생이라는 말마디와 우리가 읽고 있는 묵시록의 영혼들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 제단 아래의 영혼들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하거나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살해된 것이 아니다. 요한묵시록 6장의 영혼들은 ‘증거자’였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증언’ 때문에 살해된 것이다.
무엇을 증언했을지 그 내용을 묻기 전에 살해되었다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사 ‘스파조’(σφ?ζω·살해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요한묵시록 5장 6절 어린양의 죽음에도 사용된 동사다. 제단 아래 살해된 영혼들은 어린양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다. 이 죽음은 요한묵시록 18장에 등장하는 대탕녀 바빌론, 곧 로마 안에서 죽어간 예언자들과 성도들의 죽음이기도 하다.(묵시 18,24) 영혼들은 죽음으로써 예수와 수많은 예언자들과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인들을 대변하는 상징이 된다.
영혼들은 외친다.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갈망한다. 살해된 영혼들은 죽음으로 제 역할을 끝내지 않는다.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니다. 영혼들은 복수를 향한 갈망으로 살아 있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 가서야 복수의 결말을 이렇게 노래한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19,2) 그러나 대탕녀 바빌론, 그러니까 로마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건재했고 군사적으로 위대했으며 경제적으로 화려했다.
제단의 영혼들이 갈망한 복수는 도대체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것을 무너진 것으로 해석하고 단정 짓는 그 복수는 어떤 것일까.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현실적이지 않은, 그러므로 ‘영성적인 해석’이라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나 살해된 영혼들의 외침은 현실적이다.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많은 영혼들은 우리 역사에 선명히 남아 있는 현실의 존재들이었기에. 증거와 대립한 객체가 아무리 건재하고 위대하며 화려할지라도, 증거의 외침은 결코 멈추지 않고 역사 속에 울려퍼져 나가고 있기에.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겠다. 죽은 영혼이 살아 외치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 말이다. 죽어서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외침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한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묵시록 12장 11절을 통해 얼마간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겨 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묵시록 12장은 그 옛날의 뱀, 그러니까 악의 본령이자 근본인 용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한다. 용을 이긴 이야기는 승리를 얻어 누리는 형제들의 모습을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목숨을 잃은 것이 곧 승리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증언을 하여 죽어가는 것이 증언의 실패와 좌절이 아니라 끝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무척이나 낯설어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렵다. 그럼에도 이 낯선 생각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이 외침으로 살아 있는 이유를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능동적 증언의 한 형태라는 것, 죽음의 자리를 기꺼이 감내하는 그 의지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승리가 아니라 제 자신의 신앙을 끝끝내 드러내는 승리의 선포라는 것, 그리하여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복수를 갈망하는 그 외침 안에서 이미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저들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해된 영혼에겐 살해되었으되 희고 긴 겉옷이 주어져 있다.(묵시 6,11) 천상의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를 상징하는 흰옷은 이미 주어졌다. 죽음과 승리는 부딪혀 튕겨지는 대립의 말마디가 아니다. 죽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흰옷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죽음의 길이 아직 죽어가야 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묵시 6,11)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역사의 한 사건에 국한된 죽음과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은 시간이 스쳐 가는 역사의 매 순간 벌어지는 또 다른 승리의 시작이다. 마지막 시간, 종말을 가리키는 전통적 시간 개념인 ‘수가 찰 그때’는(4에즈 4,35-36 참조) 증언으로 죽어가는, 그리하여 흰옷을 입을 많은 영혼들의 숱한 시간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영원의 시간이다. 역사의 매 순간, 살해된 영혼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며 끊임없이 구원의 영광과 기쁨과 그 승리를 역사 안에 새겨놓을 것이다. 역사의 매 순간은 그렇게 종말의 영원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그러니까 앞선 네 개의 봉인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천상의 달콤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지독한 현실 체험이 요한묵시록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계시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봉인은 그러한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다 죽어가는 이들의 외침을 선명하게 들려준다.
봉인이 열리는 것은 그러므로 절절한 상처의 단면들을 읽어내는 이들을 요청한다. 상처 깊숙이 파고들어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에 지지 않고 이기는 법을 신앙으로 배워나가길 요한묵시록의 봉인들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죽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는 건, 위선과 배신일 때가 많다.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일로 좌절하지 말자. 상처 입을지라도, 죽어갈지라도, 살아내는 이 순간, 우리는 늘 승리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