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물이나 공기가 없이 살 수 없지만, 평소에는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사랑 또한 우리를 살게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그 중요성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얼마 전 한 수녀회의 성삼일 전례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한 수녀님께서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이제 저도 세속화가 돼서 성삼일 전례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네요.” 수녀님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사와 세상 걱정으로 마음이 무뎌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걷던 일을 회상하며 뜨거웠던 마음을 떠올린 때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어떤 경험이었을까?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자신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건네주신 말씀들, 자신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며 보여주신 친밀감에 담긴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스승의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분의 똑같은 사랑으로 눈을 뜨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그분께서 돌아가신 다음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며 똑같은 사랑으로 그들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그들이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며 새로운 희망이 떠오를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다. 재와 같던 그들 내면에 사랑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유학 시절 한 수도원에서 성삼일 전례에 참례하며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있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남김없이 당신의 온 존재를 선물로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성삼일 전례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 사랑 앞에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랑에 마음을 닫고 무딘 영혼으로 살아왔는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사랑 덕분이었다. 그 사랑은 그 어떤 사심이나 욕심도 없이 그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좋고 사랑스러웠기에 베푸셨던 부모님의 사랑이었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눠 온 우정이었다. 그 사랑과 우정이 우리를 키우고 우리 사이를 돈독히 해주었다.
살면서 많은 중요한 일을 겪고 큰 계획을 갖고 살지만, 결국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큰 위기나 시련을 겪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랑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동안 그 사랑에 왜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후회하는 우리 자신의 무뎌진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인간적 사랑을 매개로 당신의 애틋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특별히 교회 삶 전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향한 눈을 뜨도록 이끌어 주신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의 ‘사랑’에 관한 대화로 마무리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주님 사랑에, 그리고 우리 주위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에 얼마나 눈을 뜨고 살아왔나? 너무 무디고 딱딱한 마음으로 살아온 나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을 향한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면 어떨까.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