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용서와 사랑에 근거

(가톨릭평화신문)

정의는 양날의 칼과 같다. 누구에게 정의로운 일이 다른 누구에게는 불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며 절대 긍정으로서의 사랑과 달리 정의는 항상 앞에 ‘무엇을 위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정의 자체는 진리나 선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일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조건적인 행위인 만큼 간혹 정의 구현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첨예한 이념적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하기 때문이다.

정의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법조인은 법적 정의를, 정치인은 정치적 정의를, 종교인은 신적 정의를, 시민운동가는 분배적 정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이라는 ‘권리’와 관련된 고대 라틴어 격언은 정의의 기본 이념이 돼왔다.

정의는 어휘적으로 ‘올바름’ 혹은 ‘올바름의 상태’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시네’(δικαιοσυνη)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물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관장하는 여신 디케(Dike)도 이와 관련 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정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한 플라톤(기원전 428/7~348/7년경)이 정의를 지혜·용기·절제의 덕목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이 올바름의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는 특별히 대인 관계의 탁월성과 관련지어 타인에게 좋고 유익한 것을 행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품성 상태로 규정한다.

‘권리(ius)는 정의(iustitia)의 대상’이라는 아퀴나스(1224/6~1274)의 주장처럼 정의는 권리의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권리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ius)가 법의 뜻을 지니고 있듯이 정의는 권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정한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정해야 할 법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정의의 한계를 드러내곤 한다. 이는 정의와 관련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결하는 자에게 더 높은 도덕적 양심과 무한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와 관련해 잘못된 법을 교정하는 ‘공정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정의에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보편적 정의의 실현보다 윤리의식과 도덕성이다. 정의의 본질적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다. 선(좋음)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악(나쁨) 또한 항상 그른 것도 아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공정한 것인가?’의 물음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성경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아니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한 유다인들의 행위가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구약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권리와 채무의 계약 관계로 규정하고, 이것의 공정한 이행을 정의로 묘사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메시지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회심하는 인간을 항상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다. 하느님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용서와 사랑에 근거한다. 이런 정의야말로 인간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