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안 드 베스테르 성인은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부모 아래서 자랐습니다. 1859년 큰형이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했고, 수도명으로 4세기 초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실리시아 지방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순교한 다미아노 성인의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1860년 10월 7일 서원을 했습니다.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수도회는 1825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하와이 제도로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레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신학 공부 중이던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했습니다. 다미안은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구 인근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루이 메그레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다미안은 가장 먼저 하와이 섬의 퓨나 지역으로 파견되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65년에는 같은 섬의 코할라와 하마쿠아 지역으로 옮겨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성당을 짓고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지역의 유일한 사제였습니다.
이 무렵 하와이 제도의 상황은 몹시 심각했습니다. 서구 질병에 대한 항체가 없었던 원주민들은 80여 년 만에 인구가 50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또 인구의 10~15%가 한센병(나병)에 걸릴 정도로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이들을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됐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하와이 제도 중앙에 있는 몰로카이 섬의 북쪽 칼라우파파라는 오지에 강제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수용된 나환자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참담한 실상을 전해 들은 다미안은 33세에 자원해 그곳에 갔습니다.
다미안은 영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던 700여 명의 나환자에게 성사를 주고, 집뿐만 아니라 성당과 병원·학교와 보육원 등도 직접 지어주었습니다. 또 의사의 도움 없이 직접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주며 환부를 씻어주고, 붕대를 갈아주었습니다. 매일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관을 짜고 무덤을 마련해 장례도 치러주었습니다.
다미안이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자포자기에 빠졌던 나환자들도 점점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미안은 나병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을 위한 자선기금을 마련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칼라카우아 왕실 훈장도 받았습니다.
다미안은 1885년경 자신도 나병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해 계속 사목했습니다. 그는 요양하라는 주위 권고에도 계속 나환자들을 돌보다 1889년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에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다미안은 나병환자와 에이즈 환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