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메디아대성당 2만 순교자들’, 바실리우스 2세 황제 메놀로기온 세밀화, 1000년경, 바티칸 도서관 소장. 30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로마 제국 막시미아누스 황제 군사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한 니코메디아 2만여명의 신자를 성당에 가둔 채 불태워 죽였다.
3세기 막바지에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여전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이민족들이 자주 국경을 넘어오자 모든 신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도록 명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초세기부터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형장에서 목숨을 잃자 지방 행정관 플리니우스는 로마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황제를 위한 희생 제사를 바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완고함과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찬양하는 것 외에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데도 처벌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는 박해자들을 향해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처벌하고, 섬멸하라! 그대들의 불의는 분명 우리의 무죄에 대한 증명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참아내도록 내버려 두신다. (?) 그대들의 어떤 가혹한 잔인함도 아무 쓸모가 없다. 그대들이 우리를 낫으로 죄다 베낼 때마다 우리는 더 수가 많아진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이기 때문이다”(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 50,13)라며 순교를 마다치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 순교 신심과 순교자 공경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더불어 「성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순교행전」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순교」 「성녀 체칠리아의 신앙 고백과 순교」 등 많은 순교록이 저술돼 읽혔지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순교자로 기억되는 카르타고의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누스 주교(200?~258)는 순교를 독려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싸울 준비를 하고, 영원한 생명의 영광과 주님께 드리는 고백의 면류관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맙시다. (?)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변질되지 않은 신앙과 굳건한 용맹으로 이에 대비해야 하며, 그 이유로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피를 흘릴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잔을 마실 것을 생각하십시오.
곧 이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독려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온 힘을 다해 무장하고 순결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과 신심 깊은 용기로 경기에 대비합시다. (?) 우리의 전투 상대는 육과 피가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페 6,12 이하)입니다.”(치프리아누스, 「순교 독려」, 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425~439쪽)
이 시기 눈여겨볼 것은 순교를 ‘혈세’(血洗)로 인식하는 신학 사상이 생겨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두 번째 세례가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 세례와 같으며, 곧 혈세이다. 주님께서 이미 세례를 받으셨는데도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혈세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요한이 기록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는 물로 세례를 받고 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물과 피’(1요한 5,6)를 통하여 오셨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물로써 부름 받은 사람들로, 피로써 선택받은 이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께서는 찔린 옆구리 상처에서 이 두 가지 세례를 나오게 하셨는데(요한 19,34), 이는 그분의 피를 믿는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고, 물로 세례를 받았던 이들이 그분의 피를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혈세가 아직 받지 않은 세례를 대신하고 잃어버린 세례를 회복시키는 세례이다.”(테르툴리아누스, 「세례」 16. 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299쪽)
더불어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전구’에 대한 인식도 싹틉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흠숭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며 주님을 본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교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의 왕이시며 스승이신 분을 향한 그들의 비할 데 없는 신앙심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고, 동료 제자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성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17,3)
가톨릭교회는 순교를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순교자는 하나같이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