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브라질 포르투 세구루를 향하던 여객석 ‘프린치페사 마팔다’호에는 12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이탈리아 북쪽 피에몬테, 라구리아, 베네토 지방에서 온 이주민들이었고 중부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달빛도 없는 칠흑 같던 밤, 이 배는 조난을 당해 빠르게 침몰했고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탈리아의 타이타닉’으로 불리는 사고였다. 그때 제노바 항구에서는 자산을 제때 처분하지 못해 아르헨티나행을 미룬 가족이 있었다.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버지가 될 청년 마리오와 그의 부모였다. 예정대로라면 베르골료 가족은 그 배를 타야 했다.
3월 13일 출간될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희망」 서문에 나오는 교황의 가족사다. 교황은 이 사연을 전하며 “여러분은 제가 얼마나 많이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드렸는지 상상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언급했다. 베르골료 가족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29년 2월 1일, 제노바 항구를 떠나 2주간 항해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 이들만도 1929년 이전 4년 동안 20만 명이 넘었다. 도착해서도 막사 같은 곳에서 검진 등록 방역 과정을 거치고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주민으로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가족의 배경은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 후 첫 여정으로 람페두사섬을 찾는 중요한 까닭으로 작용했다. “저 역시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기에, 제 마음속에는 늘 이런 절박한 물음이 맴돕니다. ‘왜 내가 아니라 그들인가?’ … 람페두사로 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잠든 양심을 깨우고 우리 모두의 책임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습니다.”(30쪽)
「희망」은 교황이 2019년부터 집필한 것으로, 원래 사후 나올 예정이었으나 희년을 맞아 특별히 출간이 결정됐다. 희망이 필요한 시대에 전 세계인들이 사랑과 용기를 품고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역사상 최초의 교황 자서전인 이 책은 ‘교황이 생애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결정체’라는 평가 속에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동시 출간됐다.
생애 주기를 따라 25장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특유의 쉽고 따뜻한 문체 속에 영화를 보듯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전반부에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조상들 이야기를 시작으로 부모 세대가 겪은 전쟁의 아픔, 유년기의 다채로운 경험이 담겨 있다. 후반부에서는 젊은 시절의 고민, 사제 성소를 식별하고 예수회 공동체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일들, 교황 선출 직전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소개된다. 철학을 배우던 시절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공부한 사연, 청년기 짝사랑의 추억, 사제 성소를 느끼게 된 순간, 아끼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 아르헨티나 국민 영웅이자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인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일화 등이 진솔하고 담백하게 펼쳐진다. 젊은 시절, 가난한 이들에게 무심했던 고백을 통해 담담히 자신의 깊은 내면도 드러낸다.
콘클라베 기간의 에피소드 또한 흥미진진하다. 교황 선출 과정 중 77번 이름이 호명되고, 축하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브라질 우메스 추기경이 포옹하며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떠올렸다고 들려준다. 감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했을 때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전 세계를 위한 특별기도’를 바치러 나섰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혼자 걸었던 기억도 회상한다. “제 마음속에는 모든 이의 외로움이 함께했습니다. 제 발걸음에서 그들의 발걸음을, 제 신발에서 그들의 발자국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381쪽)
교황은 책의 마지막에 자신을 ‘한낱 지나가는 발걸음’이라고 표현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서 더 나은 길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이재협 신부(도미니코·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언론홍보 담당)를 비롯한 공동 번역진은 “이 책은 사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넘어서는 영적 유언이자 우리 시대에 거는 교황의 대화”라고 평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책 내용 중 “우리 가슴 속에 열정의 불꽃이 살아 있는 한, 어떤 실패도 우리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이라는 선물과 하느님의 초대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는 교황의 말을 언급하며 “이는 교황님 생애 전체를 ‘열정’과 ‘사랑’, ‘용기’와 ‘희망’이라고 압축할 수 있을 정도로 ‘희망의 순례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고 말했다.
책은 단순한 회고 성격을 넘어 교황이 삶의 자락마다 겪어 온 경험을 통해 마음에 새긴 소중한 가치와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진실한 기록이고, 그 ‘희망’의 메시지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